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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소 May 18. 2023

품절

 

 여고 시절 나는 조용하고 얌전한 편이었으며 절대 옆길로 새지 않는 모범적인(?) 아이였다. 겁이 많다 보니 일탈 같은 건 전혀 꿈꾸지 않았다. 글 쓰는 것을 좋아했고, 감성이 풍부해서 친구들이 문학소녀라고 불렀다. 국어와 문학을 좋아하다 보니 당연히 그 과목을 가르치던 선생님을 좋아하기도 했다.


 나보다 딱 스무 살이 많았던 k선생님. 배우 오디션을 봐서  떨어졌다는 소문이 돌 만큼 인물도 훤칠한 선생님이셨다. 학창 시절 제일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었는데, 혈액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여고 때 시골집에는 장독대 근처에 장미꽃이 만발했었다. 어느 날 누가 볼세라 새벽에 장미꽃을 한 아름 꺾어 첫차를 타고 학교에 갔다. 2학년 땐  담임을 맡으셨는데, 나는 유독 수줍음이 많았던 터라 표는 내지 못하고, 장미꽃을 몰래 교무실 탁자에 꽂아 두곤 했다.


 선생님은 교실로 들어오셔서 누가 갖다 놓았는지 모르겠지만 고맙다고 하면서 나를 슬쩍 쳐다보셨다. 내가 자기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아셨기 때문이다. 야간자습 시간이면 간간히 교무실로 불러서 공부하는데 어려움은 없느냐 응원의 말을 전하기도 했던 선생님. 문학 시간에는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이렇게 시작되는  정지용의 '향수'를 즐겨 불러주시곤 했다.


 고3 때도 담임이셨다. 졸업식 때 누구 하나 우는 아이가 없었는데, 나는 왜 그렇게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다. 선생님께 졸업식 선물로 그 당시 유행이었던 ‘아들과 딸 ’ 드라마 ost레코드 판을 선물했던 듯하다. 그 선생님은 나를 어떻게 봐주셨는지 모르겠지만  제자가 이 만큼 성장했다는 걸 알면 분명 좋아해 주셨을 텐데... 매년  스승의 날이 되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선생님이다.


 편지를 드리기도 했고, 통화를 한 적도 있다. 너무나 반갑게 아는 척을 해 주셨다. 여고 때 단짝 친구와 찾아뵙겠노라고 약속을 드렸더니 꼭 한번 오라고 하셨는데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계속 미뤄서 찾아뵐 기회를 영영 잃어버린 게 참 안타깝다.


 물건을 사는 일은 품절이 된다 해도 돈이 있으면, 또 그 물건이 다시 판매되면 언제든지 살 수 있는 일인데, 사람을 만나는 것은 품절되면 그것으로 끝이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나버리면 말이다. 누구든 마음속에 품고 있을 때, 조금이라도 미련이 있다면 미루지 않고 만나야 한다. 가 조만간 기회를 만들어야지 하다 보면 그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다.첫사랑이었던  k선생님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나처럼.


 당장 절친으로 지내다 세종시로 이사 간 경명언니한테 잘 지내는지 안부 톡부터  넣어야겠다.




만나고 알고 사랑하고 이별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공통된 슬픈 이야기다.
   -  S.T. 콜리지


#미루지않기

#만남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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