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국 그게 뭐라고
어린 시절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엄마였다.
올해 4월이면 벌써 4년이 되는 이야기를 다시 꺼내본다.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 작년 9월에 팔순이었던 우리 엄마. 문득 내가 마음으로 의지하고 좋아해야 할 사람이 나를 강력하게 밀어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딸에게는 철저한 무관심과 건성으로 대하는 엄마.
2020년 4월 4일의 기록
시골에 계신 엄마와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오래간만에 목소리를 듣는데도 여전히 엄마는 엄마 말만 했다. 형식적으로 사위와 손주의 안부를 물어보긴 했으나 약 15분간의 통화 중에 채 1분이 될까 싶다. 코로나바이러스 여파로 시장에도, 목욕탕에도 못 가고 꼼짝없이 집 안에만 있었다고 했다. 식료품을 배달시켰다는 이야기까지. 그 속에 나는 ‘곰국’이라는 두 글자가 가슴에 와 박혔다. 그게 뭐라고.
엄마는 코로나로 시장에 가질 못하니 마트에 전화 주문을 했단다. 식료품을 사면서 사골도 샀는데, 사골값이 제일 비싸다는 얘기와 함께. 남동생이 아침밥을 잘 못 얻어먹을 것 같아 곰국을 끓여주기로 했단다. 엄마가 남동생에게 음식을 해주는 이유는 늘 한결같다. 올케가 잘 못 챙겨 줄 것 같다고. 남동생 집과 우리 집은 차로 3분 이내다. 그 곰국이 뭐라고. 아, 우리 엄마는 여전하구나. 지금까지도 아들밖에 없구나. 오빠와 남동생.
내가 어릴 때도 그렇더니, 하나도 변한 게 없구나. 곰국을 끓여서 남동생이 가져갔단다. 코로나 때문에 우리 걱정을 한다면서 동생과 가까이 사는 나한테는 곰국 한 그릇 줄 생각을 왜 안 했는지. 물론 그 곰국 안 먹어도 된다. 곰국이 먹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엄마의 진정한 관심이 먹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남동생한테 한 찜통을 주고 딸인 내게는 일회용 비닐봉지에 한 그릇만 포장해 줬어도 충분히 고마워했을 텐데. 집에 홈쇼핑에서 주문한 갈비탕도 냉동실에 있다. 여러 번 먹었고, 당분간 먹을 생각도 없다. 하지만 그 곰국은 끝내 서운했다.
전화를 붙잡고 있는 동안 엄마가 하는 말만을 들었다. 나는 "그래, 맞다." 추임새만 넣었다. 엄마는 딸이 어떻게 살아가고, 손주들이 뭐 하면서 지내고 있는지 그런 것에는 애초에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아니 관심이 있었던들 별로 엄마에겐 안 중요했는지 애써 물어보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엄마는 아들이 먼저고, 아들의 안위를 더 궁금해한다. 딸에게도 골고루 애정을 나누어 주었다면 어린 시절 내 삶이 조금 덜 건조하지 않았을까?
남동생과 나는 세 살 차이다. 국민학교 다닐 때 (지금은 초등학교라 부르지만 ) 매일 배달되던 일일 학습지를 엄마는 동생만 시켜주었다. 저학년인 동생보다 고학년인 내가 더 해야 맞지 않냐며 나도 하고 싶다고 졸랐지만 항상 남동생이 먼저였다. 남동생은 학습지 하는 것을 귀찮아했다. 보란 듯이 나는 동생 허락하에 엄마 몰래 동생 학습지를 대신 풀곤 했다.
또 내가 친구처럼 좋아했던 개 누렁이를 엄마는 학교 간 사이 팔아버렸다. 그 돈으로 엄마는 책상을 샀는데, 역시나 동생 쓰라고 사 준 책상이라고 못을 박았다. 그 누렁이가 없어지고 일주일을 울었는데, 엄마는"내가 죽어도 이렇게 울 거냐?"면서 그만 울라고 닦달했다.
강압적인 엄마, 아버지 밑에서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말하는 것보다는 글 쓰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책에도 관심이 있었다. 어느 날 방문판매 하던 책 영업사원에게 엄마는 명작동화, 전래동화를 100권 샀다. 남매들에게 두루 재밌게 읽으라고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때도 엄마는 동생을 내세웠다. 동생 읽히려고 사는 거라고. 아니나 다를까 동생보다는 내가 책을 좋아했고, 나는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맞벌이하던 엄마가 일하러 가면서 가끔 동생에게 과자 사 먹으라고 500원짜리 동전을 주고 갈 때가 있었다. 내가 누나인데 나한테 주면서 동생하고 같이 사 먹으라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엄마는 늘 동생 손에 쥐여주고 갔다. 돈은 동생에게 있었지만 누나바라기였던 순둥이 동생은 매번 “누나는 뭐 먹고 싶은데?” “누나 먹고 싶은 거 사자.”라고 말하며 내게 앵겨붙었다. 이런저런 차별받았던 일이 수두룩하지만 내가 뚜렷이 기억하는 일들이다.
엄마는 지금도 오빠와 남동생이 먼저다. 친정 갈 때 딸들이 들고 가는 건강식품이며 영양제, 선물 등을 모아 두었다가 오빠한테 택배를 보내기도 한다. 오빠는 믿는 구석이 있었을까 가정을 꾸릴 때도 온갖 가전제품을 아버지 이름으로 할부를 끊기도 했다. 지금은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싶지만 예전에는 가능한 모양이었다. 엄마, 아버지는 화를 내면서도 오빠가 지른 할부금을 다 내주었다. 오빠가 손을 내밀 때마다 도와주었고, 아버지는 퇴직금까지 내어주었으니 말해 무엇할까?
그래서인지 오빠는 육십이 가까워 오는 나이에도 팔십을 바라보는 엄마에게 의지를 한다. 제대로 된 가정을 못 꾸린 탓도 있겠지만 병원에 갈 때마다, 변변찮은 일을 쉴 때마다 엄마에게 지원을 받는다. 딸들이 자립심을 길러 주어야 한다고 이제 그만 돈을 보내라고 하지만 엄마는 자식이기에, 아들이기에 어려운 사정을 보고 그냥 눈 감을 수 없다고 한다.
딸들과 남동생은 다 생활력이 강하고 의지가 굳다. 하지만 오빠는 아니다. 아들 아들 하면서 그 아들이 원하는 대로 다 들어준 결과가 좋지 않다. 아마 엄마는 돌아가실 때까지 오빠의 뒷바라지가 끝나지 않을 듯하다.
그래서 나는 아들과 딸에게 공평한 관심과 사랑을 주어야겠다고 다짐한다. 대한민국 일부 엄마들의 이런 남아 선호 사상이 조금 덜했으면 나를 포함한 우리나라 여성들이 더 많이 행복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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