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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 앞의 계절 Jan 28. 2021

냉장고 파먹는 방법

  

    

  냉장고를 열 때마다 냉장고가 말을 건다. "도대체 나는 언제 정리할 거야?" "여기도 수북, 저기도 수북, 엉망진창이잖아" 그렇게 말하는 또 한 사람, 신랑도 가끔 그런다. "제발 냉장고 정리 좀 해"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했다. "그래, 언젠가 한 번은 해야지" 맨날 맘만 먹는다. 실행은 하지 않는다. 필요해서 사놓은 물건들, 빈 틈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큰 맘먹었다. 냉장고 파먹기를 시작해 보려 한다. 생전 처음이다. 남들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솔직히 궁금했다. '냉장고를 파먹기란 어떻게 하는 걸까?' 이론으로 듣는 것보단 경험이 최고다. 경험만 한 것은 없다고 자부한다. 냉장고는 인간세상을 닮았다. 아주 다양하다. 앞과 뒤 순서가 있다. 잘 나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빛과 어둠이 존재한다.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있다면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 있다. 어떤 것은 아예 눈길조차 받지 못하는 것도 있다. 육해공군을 물론이고 그 외의 것들도 많다.  


  사람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냉장고를 열 때도 마찬가지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나를 당기는 구심력이 있고 반대로 나를 밀어내는 원심력이 있다. 손을 뻗게 만드는 것이 있고 내 손을 밀어내는 것도 있다. 그래서 많은 것들이 내 시야에서 멀어져 다. 눈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있으나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니 선택의 손길을 받지 못한다. 가끔 난 구석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은 마음속 이야기일 뿐, 구석은 잘 쳐다보지 않는다. 특히 냉장고 구석은 잘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래서 어느 구석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잘 모른다.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그러면서 구석을 좋아하는 척한 것이다. 척만 한 거지 실제로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지 그 단어에만 깃들어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난 빈 것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냉장고도 꽉꽉 채운다. 빈 곳이 없어야 마음이 든든하다. 그야말로 냉장고만 봐도 배가 부르다는 말은 그래서 생겼을 것이다. 시간도 빈 시간을 잘 참지 못한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여러 개의 자격증을 땄다. 욕심이 많다. 욕심의 손길이 냉장고까지 뻗어 나간 것이다. 욕심은 화를 부른다. 채워야 한다는 고집으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이젠 비워야 한다는 마음으로 냉장고 문을 닫은 채 한동안 살기로 했다. 난 너로부터 돌아서기로 큰 맘을 먹었다.  


  보름 동안 시장을 안 갔다. 역사에 남을 일이다. 이렇게까지 길게 시장을 안 간 적은 없다. 평균적으로 이삼일에 한 번은 간다. 그런데 이번은 끈질기게 참았다. 아니 지독하게 견디고 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기도 하다. 무슨 내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디 한번 해보자. 이런 심정으로. 바깥으로부터의 유혹을 견뎌보겠노라 맘먹었다. 핑계는 많다. 코로나가 좋은 핑계다. 더군다나 오늘 같이 눈 오고 추운 날은 정말 나가기 싫다. 게으름도 한 몫한다.


  난 살림꾼은 아니다. 살림에 관심이 없다. 알뜰살뜰하지도 않다. 오랜 직장생활은 나에게 그런 핑곗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시장을 가지 않는 동안 인터넷 쇼핑을 몇 가지 했다. 제철 과일이다. 과일은 박스로 산다. 사과 10킬로, 귤 10킬로. 고구마는 5킬로 이렇게 샀다. 이걸로 과일과 비상식량은 끝난다. 우리 집은 과일 주의자들이다. 채식 주의자는 주변에 많다. 우린 채식주의자는 아니다. 나를 비롯해서 모든 식구가 과일을 좋아한다. 귤 한 박스는 이삼일이면 분리수거장으로 직행한다. 사과는 한 달 정도는 간다. 고구마는 양이 작아서 열흘 정도면 없어진다.

  

  과일주 의자들의 음식물 쓰레기는 대란이다. 요리 봐도 조리 봐도 과일 껍데기뿐이다. 노란 봉투 안에서 귤, 사과, 고구마 껍데기들이 소복소복 눈처럼 쌓인다. 어제도 3킬로 봉투로 두 개나 꽉 찼다. 하루에 하나의 봉투가 다 찰 때도 있다. 어쩌면 이렇게 과일을 잘 먹는지 어떤 때는 나도 기가 찰 정도다. 과일을 그렇게 먹어도 미인이 되지는 않는다. 티브이 선전을 다 믿을 건 못된다. 다른 집들은 과일을 안 먹어서 썩어나간다고 한다. 그런 집들은 내 기준에서 이해가 안 된다. 과일을 왜 싫어하는지 모르겠다. 정말 맛있는데 말이다. 우리 집 엥겔지수는 과일값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댁에서도 친정에서도 과일 광들이라는 점을 안다. 시장을 가지 않는 내내 냉장고를 뒤적거린다.


  첫 번째로 해치워야 할 것은 야채다. 상하기 쉬운 것 위주로 먼저 해치우기로 했다. 야채는 냉장고에 두어도 금방 상한다. 떡잎이 노래지거나 시든다. 얼마 전에 치커리를 샀다. 샐러드용으로 작은 걸 샀다. 야채가 가득 쌓여 있는 곳에서 두 봉지를 골랐다. 샐러드를 하느라 치커리를 씻었다. 샐러드를 먹다가 맛이 좀 이상함을 느꼈다. 그래서 다시 봉투를 확인했다. 자세히 보니 하나는 치커리가 맞는데 하나는 근대다. 이럴 때, 살림꾼이 아니라는 게 확인된다. 근대와 치커리도 구분 못하는 불성실한 주부가 된다. 자세히 보니 잎도 줄기도 달랐다. 그제야 근대라는 것을 알았다. 근대는 나중에 된장국을 끓여 먹었다. 전혀 다른 두 야채가 비슷하다는 걸 처음 알았다. 청정채, 버섯, 양상추, 양배추, 파프리카 등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느타리는 상해 가고 청정채는 잎사귀가 노랗게 질려가고 있다. 얼른 버렸다. 빨리 먹어 치워야 했는데 쌓아 놓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다 내가. 버리는 게 반이다. 진작 해 먹었어야 했다. 시장 안 가길 잘했다. 그래야 냉장고를 비울 수 있다. 그 야채로 하루에 반찬 한 두 가지씩 했다.  

  

  두 번째는 고기다. 고기도 좋아해서 엄청 먹는다. 소고기보다 돼지고기 파다. 삼겹살을 즐겨먹는다. 수육과 김치찜을 자주 해 먹는다. 고기가 없으면 반찬이 없는 줄 아는 신랑이 있다. 냉동실엔 항상 고기가 준비되어 있다. 삼겹살, 수육, 앞다리살은 기본이다. 세일할 때 넉넉히 산다. 한번 사놓고 한동안 사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냉동실에 사놓은 고기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쟁여 놓는 스타일이다. 갑자기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할 때를 대비해서다. 다른 반찬이 아무리 많아도 고기가 없는 날은 고기 없냐며 고기를 찾는다. 요즘 삼겹살 비싸다. 조금만 사도 몇만 원씩 한다. 먹자고 돈 버는 거니 먹어야 한다고 신랑은 늘 말한다. 그렇긴 하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돈을 번다. 맞는 말이다. 냉동실을 뒤져서도 한 참을 먹었다. 수육, 김치찜, 두루치기, 김치찌개, 굽기, 등등 한동안 먹었다.


  세 번째는 장아찌류다. 평소에는 다른 반찬들이 있어서 그쪽으론 손이 안 간다. 그래서 상에 놓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야말로 냉장고 속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 우리 집 장아찌는 양배추 오이장아찌, 고추장아찌, 깻잎 장아찌, 곰취장아찌가 있다. 그중에 가장 잘 먹는 건 고추 장아찌다. 다른 것들은 즐겨 먹지 않는다. 참고로 난 고추를 안 먹는다. 싫어한다. 어릴 적부터 먹지 않았다. 이중에 재료 값은 곰취가 가장 비싸다. 몇만 원어치를 사서 담갔다. 막상 담가놓고 보니 너무 짜다. 그래서 더 안 먹게 된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검색을 해봤다. 방법은 있었다. 간장물을 버리고 사이다를 넣으면 된다고 한다. 그래서 해봤다. 정말 감쪽같이 맛이 순해졌다. 덕분에 상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양배추 오이장아찌는 이제 거의 다 먹어간다. 시장을 안 간 덕을 본 셈이다. 그게 아니었으면 여전히 냉장고 속에서 꼭꼭 숨어 있었을 것이다. 곰취는 담가 논지 오래됐다. 그동안 거의 먹지 않았다. 곰취도 열심히 먹고 있다.


  드디어 냉장고가 속을 비워가고 있음이 느껴진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 비워야 할 것들이 더 있다. 열거하지 않은 것 중에서도 비워야 할 것들이 있다. 자반, 냉동 오징어다. 그것들도 비우고 있는 중이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진 모른다. 조만간 손을 들고 항복할 시간이 도래할 것이다. 내 몸도 냉장고처럼 비웠으면 좋겠다. 속도 비우고 살도 빼고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사항일 뿐이다. 야채칸이 빈 속을 들어내고 있다. 과일 칸도 이제 속을 드러내고 있다. 고기도 거의 바닥이다. 여기저기서 텅 텅 소리가 들린다. 빨리 채워 달라 아우성이다.


  비워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냉장고만 그런 것은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자꾸만 무언가로 채우려고만 한다. 욕심은 끝이 없다. 비워있는 꼴을 못 본다. 이번 일을 계기 삼아야겠다. 그동안 채우는 것에만 급급했다. 비우고 채워야 하는데 비우기도 전에 채우는 걸 먼저 했다. 항복 깃발을 꽂는 그 순간까지 견딜 것이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 나를 향해 깃발을 흔드는 그 순간이 곧 나를 엄습할 것이다.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지 나도 모른다. 머지않아 항복할 것을 나는 안다. 저기 항복의 깃발이 나를 행해 손을 흔들며 펄럭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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