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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 앞의 계절 Jan 25. 2021

층간 소음, 괜찮을까?

                                                               






  나무 중에 층층나무가 있다. 가지가 층층으로 자라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숲해설가 공부를 할 때 홍릉숲을 자주 갔었다. 그곳에 가면 층층나무가 많다. 아래층에서부터 세어보면 십층 넘는 나무도 있다. "어쩜 저렇게 멋지게 층을 나누었을까?" 몇 층인가 궁금해서 층수를 세어본 적 있다. 층수를 세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나무 주위를 빙빙 돌게 된다. 1층 지나 2층, 2층 지나 3층. 서로 공간을 나누어 사이좋게 자란다. 나무 한 그루에 수많은 잎사귀를 매달고 자잘한 흰 꽃들이 수북이 모여 핀다. 꽃은 향기롭고 꿀도 많아 벌이 좋아하는 나무다. 나무가 자라는 방법은 다양하다. 층층나무 가지는 옆으로 퍼지며 자란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다른 나무 사이를 침범할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잘 비켜가며 층을 나눠가며 사이좋게 자란다.  


  나무가 살아가는 방법이나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이나 비슷하다. 빌라나 아파트에는 여러 사람이 모여 산다. 서로 다른 환경과 서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 숲도 마찬가지다. 한 종류의 나무만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종류의 나무들이 공간을 나누어 조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한 공간에 깃들어 산다는 것은 좋은 인연이다. 벌이나 새는 나무에 깃들어 산다. 나무도 필요한 것을 내어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다. 나무도 저렇게 층층이 잘 살고 있는데 설마 사람이 나무만 못할까? 그렇진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무도 다 생각이 있다. 어떻게 하면 햇볕을 잘 받을 수 있을까? 고민 고민하다가 햇살 쪽으로 가지를 뻗는다. 하물며 사람인데 나무보다 더 현명하게 잘 살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잘 깃들어 살 수 있다.  


  빌라에 살다가 아파트로 이사 갔다. 아이들이 어려 일부러 1층을 골랐다. 아들과 딸이 있다. 딸과 아들 노는 방법은 확연하게 다르다. 딸은 조용조용 논다. 아들은 시끌벅적하게 논다. 이쪽으로 와다다다, 저쪽으로 와다다다 정말 천방지축이다. 아들이 뛰어다닐 때마다 1층에 사는 걸 감사하게 생각했다. 만일 높은 층에 살았으면 매일 시끄럽다는 민원을 들었을 것이다. 실컷 뛰어다녀도 누가 뭐라는 사람은 없다. 층간소음이란 말을 모르고 살았다. 이웃과 다툴 이유가 전혀 없었다. 말 안 듣는 아들 딸 때문에 더러 내 목소리가 천정을 찌르는 경우가 있긴 하다. 아이들이 어릴 땐 울음에 끝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한번 울기 시작하면 언제 끝날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힌다. 어디서 저런 힘은 나오는 걸까? 궁금할 정도로 오랜 시간 줄기차게 운다. 한 여름날 나무에서 우는 매미 울음소리보다 더 시끄럽다. 경쟁을 붙여보고 싶을 정도로 운다. 그러다 내가 먼저 지친다. 지칠 땐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게 장땡이다. 유모차를 끌고 등나무 그늘로 간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다 나와 있다. 난 직장 다닌다는 핑계로 아이들 관리에 소홀하다. 어느 날, 위층 아줌마가 손톱 깎기를 가지고 나오더니 우리 아이들 손톱을 깎아 준다. 가끔 아이들을 맡기고 볼일을 보러 갈 때도 있다. 정이 많은 이웃들이었다. 그 엄마와는 지금도 가끔 연락하며 지내고 있다. 


  이번엔 아파트 2층으로 이사 갔다. 아이들은 6살 7살이 되었다. 아래층엔 우리 아이들 나잇대의 딸이 둘 있다. 돌 전까진 시어머니가 아이들을 봐주셨다. 그 이후 아이들은 둘 다 놀이 방애 간다. 내가 출근할 때 데리고 가서 놀이방에 맡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래층 아주머니가 우리 집 벨을 눌렀다. 아래층 아주머니 얼굴을 그날 처음 봤다. 살림만 하던 사람이 아니라 아는 이웃이 별로 없다. 아이들이 너무 쿵쾅거린다며 올라왔다.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아이들은 한참 쿵쾅 거리고 뛰어 놀 나이였다. 이삼일 후에 1층 아주머니가 또 벨을 눌렀다. 저녁 식사 중이었다. 우리 집 아이들이 낮에도 쿵쾅거린다며 제발 신경 좀 쓰라는 것이다. 거기다가 점심에는 우리 아이가 자기 딸을 우산으로 찔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쳤단다. 다쳤다는 말을 듣는 순간 난 얼굴이 노래졌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이가 많이 다쳤냐고 물었다. 다행히 많이 다치지는 않았다고 한다. 


  정말 죽을죄를 지었노라고 싹싹 빌었다. 아이가 다쳤다니까 덜컥 겁이 났다. 숟가락을 놓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이를 봤다, 병원에 안 가도 되냐고 물었더니 그 정돈 아니란다. 그리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조 지종을 캐물었다. 점심시간쯤에 우리 아들이 놀다가 자기 딸을 우산 꼬챙이로 찔렀다는 것이다. 그 시간대면 우리 아이들은 놀이방에 가고 집에 없을 시간이다. "잠시만요, 언제라고요? 점심시간에요? "다시 한번 되물었다.  우리 아이들은 낮에 놀이방에 간다고 설명을 해주었다. 그럼 자기가 거짓말하는 거냐며 오히려 큰소리친다. 말로 될 것 같진 않았다. 그러면 내일 아이들이 놀이방에 있었다는 증명서를 떼어 가지고 온다고 하고 집으로 왔다. 시어머니는 나한테 그 말을 듣고는 분한 지 그 집으로 다시 가자고 내 손을 잡아끌었다. 간신히 말렸다. 귀한 손자가 억울한 누명을 쓰는 건 참지 못하겠다고 하셨다. 그 아주머니 말대로라면 아이들이 놀이방을 탈출했다는 거다. 그리고 아파트 앞에서 그 집 딸들과 놀다가 모르고 우산으로 툭 쳐서 다쳤다는 이야기다. 


  절대 그럴 리 없다. 불가능한 일이다. 낮에는 시어머니도 집에 안 계신다. 혼자 계시기 심심해서 마실 나간다. 아파트 미용실에 가서 수다를 떨다 들어오곤 한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집에 오신다. 저녁에 그 일이 벌어졌다면 우리 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낮이라면 아니다. 아닌 건 아닌 거다. 다음날 퇴근 후 놀이방에 가서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놀이방에 있었다는 사실을 써달라고 했다. 증명서를 가지고 아래층으로 갔다. 잘못은 인정하는 게 맞다. 나도 억울한 것은 못 참는다. 아래층 벨을 누르자 아주머니가 나왔다. 내가 증명서를 보여주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말했다. 자기네 큰딸이 그랬다는 것이다. 우산을 가지고 놀다가 큰 딸이 동생을 찔렀단다. 엄마한테 혼날까 봐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 집은 딸들을 엄하게 키우는 것 같았다. 그래서 큰 딸이 겁나서 그렇게 한 모양이었다. 우리 아들이 그랬다고.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됐다. 아이들 싸움이 어른 싸움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사건도 그렇다. 잘못하면 큰 싸움으로 번질 뻔했다. 아이가 많이 다치지 않는 것도 다행이었다. 우리 아들도 누명을 벗었다. 그 후로는 우리 집 벨을 누르는 일이 없어졌다. 그 일로 미안했는지 잘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직장 다니는 나로서는 아래층 사람과 부딪칠 시간도 거의 없었다.


  아이들 이야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린 가끔 부부 싸움을 했다. 죽어라 싸운 적도 있다. 얼마나 크게 싸웠는지 옆집. 위층에서 다들 와서 한 마디씩 할 정도였다. 이웃들이 전화해서 경비실에서 온 적도 있다. 정말 창피했다. 그 소동이 난 뒤에야 잦아들곤 했다. 달달한 삶은 지난 지 오래다.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싸운다. 사소한 걸로 싸운다. 아직 젊은 피라 그렇다. 서로 지지 않으려고 그랬던 것 같다. 이 시기가 제일 많이 싸운 것 같다. 이웃에 고개 들고 다니기 민망할 정도였다. 나중에 만나서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민망하고 고개 들기 창피했다. 혹시나 그때 그 이웃들이 이 글을 본다면 다시 한번 사죄드리고 싶다. 아이들보다 내가  더 민폐가 됐던 셈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웃들이 나를 더 많이 이해해주고 살았던 것 같다. 아이들보다 내가 더  나쁜 이웃이 되고 말았다. 어린이보다 못한 어른이었다. 소음의 주인공이 내가 된 것이다. 반성한다. 그러는 사이 아이들은 커 가고 있다.


   또 이사를 갔다. 이번엔 3층이다. 1층에서 2층, 2층에서 겨우 3층까지 올라왔다. 이젠 아이들이 다 컸다. 쿵쾅거릴 사람이 없다. 특별하게 집에 공사를 하지 않는 한 소음 낼 일은 없다. 이사 오고 수리하느라 이삼일 시끄럽게 굴긴 했다. 시끄럽게 굴 때 미안한 마음에 이사 떡을 돌렸다. 팥떡이다. 살고 있는 아파트 라인만 돌렸다. 그때 떡을 받으시는 분들이 다들 한 마디씩 했다. 요즘 세상에도 떡을 돌리는 분이 있네. 떡은 별건 아니다. 시끄럽게 며칠 쿵쾅거려야 해서 겸사겸사해서 돌렸다. 관리실에 이야기해서 공고문을 붙이고 했다. 지금은 다들 그렇게 한다. 내가 언제부터 언제까지 시끄럽게 굴 예정입니다. 선전포고를 한다. 소음은 참을 만하다고 생각하면 참을만하다. 참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폭발한다.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생각이 달라진다.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마음이 변한다. 사람이 사는데 소리를 내지 않고 살 순 없다. 아이들 키우는 집은 어쩔 수 없다. 나도 그랬다. 조심한다고 해도 소음이 나곤 한다.


  사람 마음은 모두 다르다. 내 마음 같지 않다. 당연하다. 어떻게 내 마음과 네 마음이 똑같을 수 있을까? 그런 무리수는 두지 말아야 한다. 너와 나는 절대로 같아질 수 없다. 다르다는 전제를 밑바탕에 깔고 생각을 해야 한다. 요즘은 소음문제로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생겼다. 층간 소음 문제가 예전과는 전혀 다르다. 점점 삭막해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생명을 거론할 정도로 거대한 사회 이슈가 됐다. 최근에도 모 연예인 관련해서 층간 소음에 관련된 얘기가 뉴스거리가 되었다. 그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안타깝다. 지금은 아이들이 다 컸다. 만약 우리 아이들이 어리다면 정말 난감한 일이 많이 벌어졌을 것이다. 코로나가 가장 큰 문제다. 밖으로 나가야 할 사람들이 다들 집에만 콕 박혀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소리에 민감해진다. 밖으로 나가 스트레스를 풀어야 하는데 그렇게 못한다. 여건상 되지 않는다. 회사도 재택근무를 많이 한다. 재택근무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하긴 코로나도 생각지 못한 일이긴 하다.


   특별한 블로그를 본 적 있다. 아파트 소음을 꼼꼼하게 기록해 놓은 블로그였다. 몇 시에 무슨 소리가 났는지에 대하여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많은 부분이 새벽시간 대 기록이었다. 얼마나 잠을 못 잤으면 그 시간대에 깨어 그걸 기록하고 있었을까? 한편으론 그 심정이 이해가 간다. 나는 침대에 머리만 대도 잠을 잘 자는 사람이다. 그렇게 예민한 사람이 아닌 걸 감사하게 생각한다. 천만다행이다. 가끔 새벽에 고양이 소리에 잠 못 이룰 때도 있지만. 대부분 잘 잔다. 


  우린 지금 서로 민감하고 예민하다. 날카롭기가 하늘을 찌른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이해해줄까 가 아니라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다. 난 어쩌면 소음에서 제삼자가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랬던 내가 최근에는 조금씩 생각이 달라지는 걸 느낀다. 전보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 소음이 엄청 많이 들린다. 사정없이 들이닥친다. 시끄럽고 귀에 거슬린다. 그것을 슬기롭게 이겨나가는 나름대로의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오늘은 아침부터 이 글을 써야지 하고 컴퓨터 앞에 있었는데 진도가 나가지 않아 포기했다. 5층에서 공사 중이다. 소음이 방해꾼이 되고 있다. 소음이 문제가 되는 시대에 산다. 이웃이 이웃이 아닌 세상에 살고 있다. 문제가 생기기 전에 문제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 그러다 문제가 생기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는 방법이 필요하다. 우리도 층층나무처럼 현명하게 잘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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