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퇴직, 모퉁이를 돌다

by 꽃 앞의 계절



일, 하면 개미가 떠오른다. 개미는 정말 부지런하다. 쉬는 걸 본 적 없다. 죽은 개미는 제외다. 개미를 쫓아다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얼마나 빠른지 도무지 잡히지 않았다. 조막만 한 손으로 그 조그만 개미 하나 잡겠다고 온종일 땅바닥을 기어 다녔다. 초등학교를 들어가자 개미 하나쯤 거뜬히 잡을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선 나비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비는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좀 더 키가 자라 잠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살금살금 걸어가 손으로 날개를 확 잡아채면 쉽게 잡혔다. 메뚜기를 잡는 일도 재미있었다. 거기까지였다. 그 이후엔 곤충을 잡는 일에서 멀어졌다. 그런 일 따윈 관심 없게 되었다. 그 시절에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최근 일개미 한 마리가 일을 그만뒀다. 일하던 회사를 나왔다. 아니 퇴직했다. 그것도 정년퇴직이란 걸 했다. 이렇게 빨리 올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상상은 현실이 되지만 현실은 상상이 되지 못한다. 37년 정도 다니던 회사다. 세월이 과녁을 떠나 있는 동안 무얼 했을까? 이제 난 겨울나무가 된다. 수많은 잎사귀를 매달고 꽃을 피우고 열매 맺는 계절을 지나왔다. 나뭇잎이 하나도 없는 겨울나무 앞에서 지수가 묻는다. "선생님, 나뭇잎들은 모두 누가 데리고 갔어요?" "글쎄, 누가 데리고 갔을까?""바람이 데리고 갔나 봐요" 바람은 나뭇잎뿐 아니라 나의 직장생활도 데리고 갔다. 낙엽은 바람 따라 어디로든 흘러간다. 흐르는 동안, 몸과 마음에 빗살무늬를 새긴다. 햇살 받으면 햇살 무늬, 빗방울 맞으면 빗방울 무늬, 함박눈 맞으면 예쁜 눈망울 무늬를 그린다. 오랜 세월 흘러 지금쯤은 온몸에 어떤 무늬가 새겨져 있을까?


"너 대학 보낼 돈 없다. 상고 가서 취직해라" 엄마가 말할 때마다 난 속으로 다짐했다. "난 도시로 가서 살 거야"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취직했다. 첫 직장은 농협이었다. 공채 1기다. 발령 난 사무실은 엎어지면 코가 닿는 거리에 있다. 2분 거리다. 우리 집은 면단위 소재 시골 동네다. 직장이 가깝다는 사실에 짜증이 확 났다. 도시로 나가고자 했던 마음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1년을 간신히 채우고 사표를 던졌다. 서울을 동경하던 시골쥐는 동화처럼 서울로 상경했다.


서울엔 큰집이 있다. 큰 아버지는 직업군인이다. 빳빳한 군복, 반질반질한 군화를 신으면 정말 멋지다. 큰집 삶은 군복을 닮았다. 모든 물건은 각이 잡혀있고 생활도 반짝반짝 빛났다. 밖에는 늘 운전병이 대기하고 있다가 큰아버지를 태우고 출근했다. 큰아버지는 유난히 구두에 관심이 많았다. 겨울, 난로 옆으로 온 신구들 구두가 나와 있다. 구두가 살짝 노곤 노곤해지면 헝겊으로 광을 내곤 했다. 빛나는 삶은 얼룩덜룩을 견디지 못한다. 경직되었던 말들은 주말이 돼서야 겨우 풀어지곤 했다. 빌붙어 사는 나에게서 빛나는 건 오로지 구두뿐이었다. 자유를 갈망하던 생활에 나도 모르게 각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시골 쥐의 서울 생활은 막막했다. 취질 할 직장도 반겨주는 사람도 없었다. 무슨 똥 배짱으로 왔는지 모르겠다. 서울에 오면 무엇이든 다 될 줄 알았다. 상상 속 서울과 땅을 직접 밟아본 서울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생각처럼 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이력서를 수십 통 넣어도 소식은 깜깜이었다. 그나마 농협에서 일 년 벌었던 돈마저 달그락 거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수중에 공중전화 값, 20원이 없어 전화도 걸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다. 무당벌레는 아등바등거리다 뒤집어졌다. 농협을 때려치운 결과는 텅 빈 주머니 만지작 거리는 일이었다. 뭐든지 해야만 했다. 아동 책 외판원, 마트 계산원. 등 몇 가지 일을 하다가 조그만 병원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참 간단했다. 아는 언니가 서류에 글씨 좀 써달라고 하기에 써줬다. 그 글씨가 인연이 되어 취직이 되었다. 그러다 지금 다니는 직장으로 이직했다.

스물세 살, 꽃 띠다. 꽃다운 나이에 입사했다. 그 시절만 해도 직장생활 2-3년 하다가 시집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래서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3-4년 직장 다니다 결혼하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들 이야기 일뿐. 나의 이야기는 아니다. 난 서른한 살에 결혼했다. 직장이 부천이라 서울에서 부천으로 이사했다. 첫 월급은 17만 원이었다. 작지만 큰돈이었다. 월급쟁이는 월급날만 손꼽아 기다린다. 월급봉투를 받는 날은 기분 최고다. 한 달을 꼬박 일하고 받는 월급, 기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이야 통장 계좌로 월급이 나오지만 그 당시엔 노란 봉투에 현금으로 줬다. 봉투에서 돈을 꺼내 지폐를 세어 본다. 그 느낌 환상이다. 돈이 많고 적고를 떠나 돈을 셀 수 있어 좋다. 몇 장 세어지진 않지만 수백만 원을 세는 마음이다. 센 것을 또 세곤 했다. 명세서에 쓰여 있는 금액보다 적을까 봐? 혹시 한 장을 더 넣진 않았나? 늘 확인사살을 하곤 했다. 기쁨도 잠시 월세, 전기세, 수도세, 등등 나가야 할 돈들이 손 벌리고 있었다. 한 푼 두 푼 모아서 언제 전셋집을 구할 수 있을까?

세월이 가면서 월급도 조금씩 올랐다. 월급이 올라가면 갈수록 물가도 따라 올라갔다. 또한 내가 내야 할 돈들도 덩달아 오른다. 살고 있는 집의 전셋값도 올려줘야 했다. 많은 것들이 월급에서 빠져나갔다. 뭐 그래도 시골에서 사는 것보다는 이 곳 생활이 나는 훨씬 좋았다. 많은 것이 부족했으나 많은 것이 채워지곤 했다. 채워지는 것이 꼭 돈은 아니었으나 나름대로 생활에 만족하며 살았다. 그러는 사이에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남동생 둘이 서울로 대학을 왔다. 그렇게 동생들과 복닥복닥 살다 보니 세월이 남들보다 두배는 빨리 간 것 같다.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37년간 수많은 일들이 생겼다. 처음 내가 근무했던 부서는 외부 사람들이 수시로 들락날락하는 곳이다. 그 사람들이 나를 보면 늘 하는 말이 있다. "아직도 근무하고 계시네요""네, 그러네요" 오랜 세월 콕 박혀서 근무했다. 그렇게까지 근무하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이 곳에서 난 나름대로 보람 있는 일을 했노라고 자부한다. 남들이 두려워하는 길을 두려워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갔다. 먼저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될 일들이 생겼다. 휴일 근무를 해도 수당을 주지 않았고 퇴근 후 추가 근무를 해도 수당을 주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도 월급을 올려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월급이 남들보다 많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몇 명이 모여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나의 삶은 노조를 만든 이후의 삶과 그 이전의 삶으로 나뉜다. 달라도 너무 많이 달랐다. 그때부터 간부들 눈에 나기 시작했다. 많은 일들이 터졌다. 그동안 곪았던 것들이 댐 터지듯 확 터져버렸다. 갑과 을의 전쟁이 시작됐다. 갑은 영원히 갑이고 을은 어쩔 수 없이 을이라는 걸 실감했다. 갑과 을의 생각은 도무지 좁혀지지 않았다. 갑은 갑대로 을은 을대로 서로의 견해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을은 생계가 달려있으니 죽어라 매달릴 수밖에 없고 갑은 갑이라는 걸 내세워 큰소리 땅땅 치며 굽히지 않았다. 우린 어쩔 수 없이 파업을 해야 했다. 그로 인해 몇 개월 정직도 당해봤고 그 유명하다는 뉴스에도 나왔다. 부당한 것에 대한 정당한 방법들이 이상한 시선으로 밖으로 퍼지곤 했다. 터널은 암흑이었다. 가끔 자동차들이 지나가긴 했으나 본척만척했다. 그냥 지나가는 행인들 뿐이었다. 그 터널을 빠져나오는데 참 오랜 세월이 걸렸다. 다들 힘들고 지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죽을 것만 같던 시절도 다 지나갔다. 다 지나가리라.


파란만장하다는 말, 나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는 동안 난 결혼을 했고 아들과 딸을 낳고도 죽어라 다녔다. 이때부터 난 나 스스로에게 세 가지를 다짐했다. 첫째, 무슨 일이 있어도 정년퇴직까지 다닌다. 둘째, 해외여행 보내 줄 때까지 다닌다. 셋째, 승진할 때까지 다닌다. 노조를 만들고 얼마 되지 않아 원장님이 노조 창립 멤버들을 "모두 잘라 버려" 명령을 내렸다. "그래? 그러면 그와 반대로 난 정년까지 꼭 다녀야겠어" 다짐했다. 장기근속자에게 외국여행을 보내주는 사규가 있었는데 노조간부라는 이유로 보내주지 않았다. 같은 이유로 승진도 시켜주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을 말단으로 지냈다. 그래도 조합이 있어 큰 위안이 됐다. 그때 조합은 우리에겐 키다리 아저씨였다. 싸움터였지만 휴식처였다. 그래도 퇴직할 때는 세 가지를 모두 이루어 냈다. 정년퇴직을 했고 해외여행도 갔고 보잘것없으나 승진도 했다. 내가 정년까지 근무할 수 있었던 것은 노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노조가 없었다면 정년을 채우지 못했을 것이다. 노조가 설립 되기 전, 여직원들은 결혼하면 퇴직한다는 규정이 있을 정도로 빈약한 사규였다. 비밀리에 결혼하고 개인 휴가 받아 신혼여행을 갔다 온 직원도 있었다. 물론 그 후에 그 사규는 우리가 바꿔 놓았다.


그랬던 내가 드디어 정년퇴직을 한 것이다. 정말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긴 하는구나 싶다. 말로만 듣던 정년퇴직, 그렇게 마음속으로 되뇌고 되뇌던 그 날이 드디어 온 것이다. 정말 오랜 시간이었다. 힘들고 지친 시간도 있었지만 그래도 많은 것들을 이루어냈기에 만족한다. 근무를 하는 동안 내내 직장 동료들과는 정말 끈끈한 정이 많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힘든 세월을 함께한 동료들이기에 감사하다. 지치지 않고 함께 뜻을 모아 헤쳐나간 동료들이 참 자랑스럽다. 그렇게 함께한 동료들과의 이별이란 정말 눈물이 날 수밖에 없다. 며칠 동안을 눈물로 보낸 것 같다. 눈에 띄게 또는 눈에 보이지 않게 많은 눈물을 흘렸다. 퇴직이란 말만 들어도 눈물이 주르륵 흐르곤 했다. 그래도 내가 오래 다녔던 곳이라 정도 많이 들었다. 나쁜 기억보다는 그래도 좋았던 기억이 더 많다.


퇴직을 하고 보니 정말 기분이 묘했다. 출근해야 할 직장이 없다는 것 자체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일을 하다가 어느 순간 할 일이 없다는 사실이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그래서 어떻게든 직장을 다시 잡아보려고 이력서를 들고 고용노동부를 찾아가곤 했다. 그러나 정년이 넘은 나이의 나에게 돌아올 취직 자리는 없었다. 젊은 친구들도 노는 마당에 나에게까지 올 자리는 없는 게 현실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구질구질하게 직장을 잡으려 했다. 이력서를 본 담당 직원이 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하셨는데 좀 쉬시지 왜 또 직장을 다니시려고 하세요?" 반문했다. 그러다 난 깨닫게 되었다. 난 이미 정년을 지난 나이고 나를 받아줄 곳은 없다는 현실을 직시했다. 그리곤 현실에 안주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열심히 일한 당신, 드디어 훨훨 날아갈 것이다. 그게 어느 곳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혹시 바람이라면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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