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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 앞의 계절 Mar 27. 2021

눈 깜짝할 사이

  



  승우가 은유를 밀었다. 정말 순간이었다. 은유는 책을 보고 있었다. 은유 울음이 터졌다. 괜찮다고 말해주니 금방 뚝 그친다.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다. 분명히 조금 전에도 승우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손이 뻗어 나가는 것을, 그 찰나를 놓친 것이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다.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보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나의 눈이 놓친 것을 무엇일까?  나의 시야에서 순간 사라졌던 승우의 팔은 어디로 가야 볼 수 있을까?


  프랑스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생 라자르 역 뒤에서'라는 작품을 본 적 있다. 솔직히 사진에 대한 지식이 없다. 잘 모른다. 시 공부 시절, 선생님이 좋은 작품이니 한번 찾아보라고 해서 찾아본 기억이 전부다. 라자르 역 앞에서 모자를 쓴 한 남자가 물 웅덩이를 피하려고 점프하는 순간을 카메라에 담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16시간을 기다려서 얻는 결정적 순간이라고 한다. 그런 찰나의 장면을 카메라에 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역은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간다. 수많은 사람들을 뚫고 지나가는 그 한 사람을 앵글에 담기 위해, 그 공중의 시간을 찍기 위해 작가는 정말 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다. 16시간의 투자 끝에 그 찰나를 얻는 것이다. 그 작품만 본다면 찰나는 16시간인 셈이다. 그 작품뿐만이 아니라 모든 작품들마다 그 이상의 시간을 투자했을 가능성이 있다.


  찰나도 미학이다. 은유가 앞에 놓여있는 과자를 순식간에 입에 넣는 것도 엄청 빠르다. 생일날 케이크에 촛불을 켜놓고 훅, 입김을 불어넣는 순간도 아름답다. 벽에 걸린 시계가 째깍째깍 소리로 지나가는 것도 순간이다. 곰돌이 색칠하라고 준 색연필로 책상에 순식간에 낙서하는 손길도 밉지 않다. '은유, 왔어요?' 물음에 '아니요"대답하는 반항심도 순식간에 없어진다. '장난감 뺏지 않을게요" 금방 말해놓고 뒤돌아서 또 빼앗는 윤서도 이쁘다. 구급차를 잘 가지고 놀다가도 싫다고 던져버리는 순간도 찰나다. 아이들의 순간은 미학이다.


 화분에 삼색제비꽃이 폈다. 제비꽃을 바라보고 있던 은유가 묻는다. 나비는 어딨어? 꽃이 폈으니까 오겠지. 얼른 전화해, 빨리 오라고. 전화는 하지 못했다. 나비에게 전화하라는 순수한 마음에 나는 전화를 하지 못하는 순수하지 못한 마음을 가진 어른이다. 그런데 정말 나비가 왔다. 은유의 마음을 나비는 알고 있었을까? 나비가 제비꽃에 앉았다. 은유가 그 옆에 쪼그리고 앉는다. 순간 나비가 날아간다. 분명히 지키고 있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갔다. 꽃은 그대로인데 나비는 날아가고 없다. 계절은 그대로인 것 같은데 나비처럼 세월은 지나간다. 그네를 밀어주던 손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듯, 시소를 타고 있던 아이들이 싫증을 내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듯, 미끄럼틀을 타고 주르륵 세상을 내려오듯, 바람은 휙 불고 시계는 움직인다.


  놀이터에 구멍이 송송 뚫려있다. 그 구멍 앞에 있던 지후가 말한다. '개미다' 개미는 그 말과 함께 구멍 속으로 사라진다. 지후는 구멍 속으로 손가락을 넣으려 애쓴다. 순식간에 구멍으로 들어간 개미는 보이지 않는다. 개미의 구멍은 작다. 그럼 개미의 시간은 작은 걸까? 지후는 개미보다 크다. 그럼 지후의 시간은 큰 걸까? 개미가 들어간 구멍 앞에서 지후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는다. 개미가 기어 나올 때까지 기다릴 셈인가 보다. 그러나 개미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기다리다 지친 지후는 다른 구멍을 찾아 떠난다.


   준수가 공놀이를 한다. 공은 땅을 박차고 순식간에 공중으로 튀어 오른다. 공중에 떠 있는 순간도 순식간이다. 공 입장에서 보면 땅에 맞닿는 순간도 공중의 순간도 찰나다. 준수에게도 찰나다. 그 찰나를 따라 준수가 뛰어다닌다. 그 찰나를 지나며 준수는 키가 크고 자랄 것이다. 준수는 공을 던지고 공을 잡느라 바쁘다. 찰나의 순간은 한동안 이어진다. 찰나가 모여 공이 되고 땅이 되고 공중이 되고 준수가 될 것이다.


  커피 알갱이를 잔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 순식간에 알갱이가 녹는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렇다면 알갱이의 시간은 없는 것일까? 흔적이 없다고 사라졌다고 그의 존재가 없어진 것일까? 그 알갱이는 커피라는 기호식품 존재로 스며들었다. 누군가의 시간에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가 자기의 생을 대신 살아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찰나의 희생으로 값진 다른 생을 선물한 셈이다. 커피 한잔을 마심으로 두배로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다. 이것 또한 커피의 미학이다.


  모든 것은 찰나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도 찰나다. 찰나가 모여 계절을 만든다. 언덕을 만난 염소가 풀을 뜯는다. 풀을 뜯던 계절이 마을로 내려온다. 골목을 어슬렁대던 전신주가 발길을 재촉한다. 나무에 앉은 참새들이 짹짹짹 수업 중이다. 삐죽 고개를 내민 새싹들이 누가 딴전 피나 살피고 있다.  

목련이 벙글어진 얼굴로 교실을 기웃거린다. 움트는 봄도 순간이다.  째깍째깍 찰나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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