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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별 Mar 17. 2022

예쁘고 맛있기까지 한 술, 와인

   태생적으로 나는 시각적인 것에 예민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찌나 유난스러운지 먹는 거 하나도 낯설거나 못생겼다고 생각하면 입으로 넣는 게 그렇게 힘들었다. 지금은 없어서 못 먹는 곱창, 염통, 대창, 매운탕, 멸치를 먹는 게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 힘들었다. 그날도 평소처럼 할머니가 밥 먹으러 거실에 나오라는 부름에 하던 일을 모두 내팽개친 채 밥을 먹으러 거실로 나갔다. 우리 엄마는 요리에 소질이 있으신 분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마음에 위안이 되는 것은 할머니의 요리였다. 그렇게 나의 집 밥의 맛은 할머니의 맛이었다. 그래서 할머니가 밥 먹으러 나오라는 말은 나에게 늘 신나는 말이였다. 식탁에 앉자마자 찌개부터 입에 넣기 시작했다. 먹자마자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리고 나의 눈에 들어온 건 둥둥 떠있는 생선의 살들이었다. 그 순간 나는 충격을 먹고 엉엉 울며 내 방으로 들어갔다. 당시 나에게 생선은 구워 먹는 것이였지 탕에 들어간 생선의 모습은 나에게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매운탕을 끓여준 할머니는 당연히 매우 당황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손녀에게 맛있는 걸 주겠다고 애써 노력한 할머니의 마음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특정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난 유별난 아이였다. 나이를 먹으면서 두려움도 사라지고 먹기 힘들던 음식들도 잘 먹게 되었지만 타고난 성향이 쉽게 사라지진 않았다. 여전히 어딘가 낯설고 못생긴 음식들을 먹는 게 그렇게 힘들었다. 그런데 웃기게도 내가 평소 먹기 힘든 음식이 예쁘게 플레이팅 되어 나오면 먹고 싶어 지는 것이다. 웃긴 일이다. 겉모습만 바뀌었을 뿐인데 먹고 싶은 마음이 들다니. 이런 유별난 나이기에 파스쿠아 일레븐 미닛은 내가 와인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기 아주 충분했다.


   내가 주로 봐온 와인 병은 어두운 색에 세로로 긴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라벨은 어딘지 어려운 영어 단어들이 필기체로 적혀있었다. 그런데 파스쿠아 일레븐 미닛은 옆으로 통통한 병에 살구빛 와인의 빛깔이 투명하게 비치고 있었다. 거기에 내가 난생처음 보는 라벨지가 붙여있었다. 가운데 구멍이 뚫린 세로로 긴 타원형의 라벨지에 날카로운 볼펜으로 그린 듯한 섬세한 덩굴과 나비가 그려져 있었다. 넋을 잃고 라벨을 보다가 나는 깜짝 놀라는 부분을 발견했다. 라벨지의 구멍이 뚫린 공간 사이로 한 우아한 여성이 눈을 감고 있는 것이다. 조금 과장된 표현을 하자면 나는 어떤 예술작품의 오브제를 보는 것 같았다. 와인의 빛깔, 병의 모양, 라벨의 디자인 그리고 넋 놓고 보다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눈을 감고 있는 우아한 여성의 모습까지 이 와인의 맛을 잘 설명하는 듯했다.


   그 뒤로 먹어 본 와인에 로쏘 투 유, 파스쿠아 스윗 로제, 타피 쇼비뇽 블랑, 브레드 앤 버터, 세그라도 핑크 포트 등 와인의 병 모양과 라벨지가 맛을 닮은 와인들이 있다. 먼저 로쏘 투유 는 칠판 와인이라는 별명답게 와인 병이 칠판처럼 되어있다. 단어 그대로 칠판이어서 분필로 글씨를 쓸 수 있다. 당연히 분필도 같이 동봉되어 판매된다. 크리스마스 때에 나온 로쏘 투 유는 전구랑 스티커까지 동봉되어 있다. 맛은 아기자기한 외형과 결이 비슷한 달달이 레드 와인이다. 파스쿠아 스윗로제는 병의 몸통이 옆으로 오동통하다. 오동통한 병에 붙어있는 분홍색 라벨지가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색감을 어찌나 잘 뽑아냈는지 그 분홍색만 봐도 당장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분홍색 라벨지 위에 스윗 로제라고 쓰여 있는 서체는 또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당도가 높은 로제 와인은 아니지만 와린이에게도 언뜻 느껴지는 베리류의 맛이 있다. 타피 쇼비뇽 블랑은 파란색의 배경에 여러 무늬의 종이들을 오려 *콜라주한 산이 그려져 있다. 청량감이 오롯이 느껴지는 라벨이다. 실제로 맛도 냉장고에 살짝 넣어놓은 뒤 마시면 산뜻한 산미가 느껴진다. 버터 앤 브레드라는 단어는 밀가루, 달걀, 소금, 버터 같은 제빵의 가장 기본적인 재료만으로 만든 느낌을 준다. 그 느낌처럼 라벨지도 흰 바탕의 라벨지 위에 가운데에 버터 앤 브레드라고만 덩그란히 쓰여있다. 참으로 담백한 라벨지이다. 세그라도 핑크 포트는 내가 지금까지 본 와인 병 중에 제일 귀여운 디자인의 병이다. 크기도 다른 와인 병에 비해 아담한데 병의 어깨가 굉장히 둥글다. 병의 바닥부터 약 4cm 까지는 와인이 담겨있지 않고 투명한 유리로만 되어있다. 와인은 투명한 유리 위부터 담겨있다. 라벨도 네모난 모양이 아니라 조금 복잡한 모양인데 병과 잘 어울리는 디자인이다. 와인도 굉장히 예쁜 붉은빛을 띠고 있다. 맛은 포트 와인답게 굉장히 달콤하지만 도수는 세다. 와인 병의 모양과 라벨지는 맛이 어떨지 상상하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물론 라벨지에 적힌 내용이 주는 맛에 대한 정보도 있지만 신경 써서 만든 와인 병과 라벨지의 디자인은 직관적으로 맛을 상상하게 한다. 유달리 시각적으로 예민한 나에게 와인은 예쁘고 맛있기까지 한 술이다. 그리고 하나의 작품을 보는 기분을 들게 해 주어 조각품을 보는 것 같은 재미를 주기도 하는 재밌는 술이다.


* 콜라주: 근대 미술에서, 화면에 종이ㆍ인쇄물ㆍ사진 따위를 오려 붙이고, 일부에 가필하여 작품을 만드는 일. 광고, 포스터 따위에 많이 쓴다.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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