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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갈잎의노래 Jun 02. 2024

그 면전에서 상생을 빌었다.

아야 소피아의 숙명



아야 소피아 하면 이스탄불이다.

이스탄불 하면 아야 소피아를 누락시킬 수 없다.


약간 과장하면 '아야 소피아는 곧 이스탄불'로 등치될 만큼 이스탄불의 핵심 상징이다. 

이스탄불은 아야 소피아 있어 복하다. 문화 도시 자부심을 갖도록 든든한 둿배가 되어주니까.    

 


아야 소피아의 정체성은 통합과 상생이다.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간의 충돌 과정을 거치면서 탄생했다.

쌍방의 가치를 적절히 인정하고 적당히 배려해서 존속된 구조물이다.

여기에는 양 극단의 신념이 수렴되어 있고 두 대척 세력간의 타협의 결정체가 구현되어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 두 종교가 한 공간에서 공존하는 독특한 특징을 가진다.

아야 소피아의 역사적 생존은 문명의 자랑거리이고 문화의 감동 요소이다.     




아야 소피아 성당에 진입하기 전에는 큰 호흡으로 숨을 여 마셔야 한다. 성당 내부로 발을 젓발을 디디는 순간 숨이 멎기 때문이다.


건축 예술에 대해 문외한이라도 상관없다. 아야 소피아 정면에서 맞딱뜨리면 오랜 세월의 역사적인 상흔이 담겨있는 중후한 웅장함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건축 조형물의 마디마디에 새겨진 고풍스럽고 정교한 미적 치장은 가슴먹먹한 감동을 불러온다. 건축 미학의 예술성이 건축물 전반에서 전방위적으로 발산된다.    

 


다채로운 색상의 화강암으로 수려하게 치장된 바닥 면과 기둥들에 단단함의 미적 기품이 품어져 나온다. 높다란 천정과 벽면에 수 놓아진 섬세한 모자이크 장식들은 디테일한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을 수려하게 펼쳐 보인다. 건물 벽과, 구조물 곳곳 벽면에 그려진 중우한 분위기의 성화들은 신비로운 종교적 세계로 빠져 들게 한다. 은은한 브라운 톤으로 채색된 본당 공간은 웅장하고 장엄하여 시야에 온전히 담기가 어렵다        


아야 소피아로의 행보는 이스탄불 여행의 백미이다. 아야 소피아는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이다.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을 대표하는 동방 정교회의 대성당이었다. 성당의 건축 재료는 제국의 전성기 때 제국의 곳곳에서 조달되었다. 그리스의 신전 건축물 재료를 비롯하여 비잔틴 제국 전역의 고급 자재가 동원됐다.   

  


아야 소피아는 여러 차례 변모하는 역사적인 운명을 겪었다. 명칭도 건축물의 용도에 따라 시대별로 다르게 불렸다. 이름의 변천사를 보면 역사적인 부침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성당 이름을 큰 교회라는 의미를 가진 ‘메가리 에크레시아’ 라고 지었다. 두 번째로 성당을 재건했을 때는 이름을 ‘하기아 소피아’로 변경했다. 이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비잔틴 제국이 무너지면서 성당은 모스크로 바뀌게 된다. 지금은 아야 소피아로 불리고 있다.     


아야 소피아는 동로마 콘스탄티누스1세가 콘스탄티노플(현재 이스탄불)로 수도를 옮긴 후 만든 황제의 성당이었다. 이후 성당은 화재로 소실된 후 새롭게 재건되었다. 그러나 재건된 성당 또한 화재로 큰 피해를 입게 된다. 현재의 아야 소피아는 527년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세 번째로 완성된 건물이다. 지금의 아야 소피아 성당의 모습이다. 이후 약 920년간 비잔틴 제국을 대표하는 성당으로 자리 잡는다. 첫 번째, 두 번째 화재로 소실된 초창기의 건축물 흔적들이 지금도 성당의 한쪽에 남아 있다.   

   


역사는 아야 소피아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아야 소피아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사건이 발생한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마흐메드 2세는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을 멸망시켜 버렸다. 기독교 문명을 근간으로 하는 제국의 천년 영광은 마침내 막을 내리게 되고 성당의 운명도 바뀌게 된다.   

   

과거 정복의 역사를 보면 정복자는 저항 의지를 겪기 위해 피정복자를 완전히 무력화 시킬 수단을 감행한다. 피점령국의 수많은 인명을 살상할 뿐만 아니라 피정복지의 주요한 상징적인 건축물도 파괴하고 약탈했다.      


정복자 오스만 제국도 성당을 모스크로 용도를 변경하고 이슬람 사원 기능이 가능하도록 개조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 다행스럽게도 큰 틀에서 성당 본체를 훼손하지는 않았다. 기독교 성당인 아야소피아는 이슬람 모스크로서 변신하면서도 치명적인 상처없이 생존했다. 정복자에 의해 완전히 파괴될 수 있는 역사적 운명을 아야 소피아는 용케도 비켜나갔다.      



종교, 문화적으로 쌍극인 두 세력권의 강력한 충돌에서 아야 소피아 성당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정복자 오스만 제국의 권력자가 큰 포용력으로 피정복자자에게 아량을 베풀었던 것일까. 아니면 파괴하기에는 너무나 고상하고 기품이 있는 예술적 건축물 인지라 차마 무너뜨릴 수  없었던 것인가. 이도 아니면 신의 자비로운 보호 손길이 아야 소피아를 굳건히 붙들고 있었가. 어쨌든 아야 소피아의 건재는 인류 문명 기적적인 축복이다.    

     

물론 모스크로 용도 변경을 천명하면서 사원 구조가 일부 변경된다. 성당 내부의 화려한 그리스도교 성화들은 횟칠로 덮여졌다. 민바르(설교 단상)와 미흐랍(메카의 방향을 나타내는 문)이 추가 되고 정면 제단은 메카를 향해 방향을 틀어버렸다. 실내 벽면에는 무슬림의 경전들을 새겨 넣다.

     


본당 예배당에는 목판에 금색으로 새긴 거대한 캘리그래피(글자를 미적으로 조각한 것)를 여덟 기둥에 걸었다. 여기에는 각각 하나님과 마호메트, 술탄 성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본당 사방 주변에는 모스크를 상징하는 네 게의 미나렛(첨탑)도 세웠다.      


그럼에도 치명적인 손상이 아닌 부분적인 개조와 변경이었기에 아야 소피아의 기본적 형태는 본래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  모스크로 변신한 아야 소피아는 이 후 480년간 이슬람 사원으로 역할하게 된다.         

 


20세기 초 아야 소피아는 또 한번 역사적인 운명을 맞는다. 튀르키예에 세속주의를 표방하는 공화국 정부가 들어선 것이다. 정치과 종교의 분리를 원칙으로 삼는 무스타파 케말 대통령은 아야 소피아 성당을 박물관으로 변경했다. 이곳에서의 모든 종교 활동도 금지시켰다. 마침내 아야 소피아는 오랫 세월동안 짊어진 종교 건축물의 굴레를 벗게 된다. 종교적인 방황에 종지부를 찍는다.     


성당 및 모스크의 종교적 색깔을 벗어 던진 아야 소피아는 근대 이후 박물관으로서 중립적 위상을  지켜갔다. 하지만 아야 소피아의 부침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역사는 아야 소피아를 다시 소환했다. 2020년 에르도안 현 집권 대통령이 아야 소피아 박물관을 다시금 이슬람 사원으로 회귀시켜 버렸다. 어렵게 벗어던진 종교적 굴레가 다시 씌어졌다.     

     


아야 소피아 내부 오스만 제국이 모스크로 지정할 때 횟칠로 가렸던 기독교 성화들이 많이 복원되었다. 500여년 동안 감추어졌던 성화들이 드러나자 초기의 성당 분위기가 물씬 되살아 났다.   


 당시 시대적 용도에 따라 건축물의 가치와 의미를 논한다. 그러나 아야 소피아에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신이 깃들어 있다. 기독교 성당과 무슬림 모스크로서의 기능들이 융합되어 승화된 통합성이다.



아야 소피아의 공간에는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상징들이 뒤섞여 있다. 두 종교를 뚜렷하게 갈라놓을 수 있는 공간 분리가 불가능하다. 성당의 종교적 기원을 떠나 아야 소피아는 역사와 문화적으로 대립 관계인 양 극단의 문명을 모두 포용하고 있다.      


이 공간에 들어서면 기독교 신자들은 마음의 안식을 얻는다. 성당 곳곳에 그려진 성화와 상징물에서 기독교의 향기를 은은하게 맡을 수 있다. 무슬림 신자 또한 이 공간이 어색하지 않다. 벽면에 새겨진 코란 구절을 통해 무슬림의 가르침을 받으며 평안을 얻을 수 있다.     



실제 관광객으로 아야 소피아 경내에 들어서면 운집된 사람들 간에는 스스럼이 없다. 종교는 다를지라도 행동과 태도들이 자연스럽게 부대끼고 관람하는 과정에 마음의 벽은 전혀 의식되지 않는다.     


아야 소피아는 파란만장한 긴 세월을 거치면서 통합과 상생을 상징하는 유물이 되었다. 이 건축물의 현존은 양대 문명권이 파괴와 유린 대신 조정과 타협으로 매듭지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아야 소피아의 뼈대는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 꽈배기처럼 엮 골격으로 다져졌다.    



우리는 복 받은 사람이다. 지난한 진통과 수난을 지혜롭게 헤쳐나온 결과로 자칫 역사속으로 사라질 뻔한 유서깊은 건축물을 눈앞에서 바라볼 수 있어서.      


아야 소피아 앞 광장에는 늘 사람들이 붐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종교와 인종, 계층과 신분을 따질 겨를도 없다. 그렇듯이 이곳에서는 그냥 인류라는 공동체적인 동질감만 느껴질 따름이다.    

  

기독교와 마흐메트교는 아야 소피아에서 융합되었다. 대립를 어떻게 해소해야 쌍방 모두에게 유익한지를 아야 소피아는 증언하고 있다. 화해와 통합을 이루어 갈 혜안을 아야 소피아는 간파하고 있다.   

  


갈등과 불신이 난무한 세태,

단절과 배척이 팽배한 시대,

우리편과 너희편으로 편 가르기가 남발되는 세상살이에서      


아야 소피아,

그 면전에서 상생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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