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들여다보면 길거리 군데 군데 도시의 이미지가 덧칠해져 있다. 도시의 정체성은 역사적인 유적물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좁은 길거리에서도 드러나고 작은 골목길에서도 표출된다. 거리를 걸으면 이스탄불의 세세한 정체성들이 눈 앞에 펼쳐진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반가운 손님은 담벼락 그림이다. 길거리 군데군데 그려진 담벼락 회화들은 재미있고 정겹다. 그림 주위에 낙서하듯 휘갈겨 놓은 무늬 형태 글자들도 그림과 잘 어울린다. 현지 언어를 모르는 우리는 글자 내용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그림 또한 무엇을 표현하려고 하는지 이해하려니 막막하다.
그럼에도 담벼락에 그려진 그림이나 글자들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일단 멋스럽고 흥미롭다. 우리에게 생소한 그림 담벼락은 이러저런 주제를 담은 길거리 미술관이다. 제작자는 어떤 의도를 통해 이 장면을 제작했을 것이다. 내용은 몰라도 느낌은 있다.
그림에서 풍겨지는 재미있는 캐릭터, 멋스러운 회화를 보면서 이곳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고의 한 단면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한 조각의 그림일지라도 여기에는 이곳의 의미가 담겨 있다. 길가의 이런저런 풍경들은 이곳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진솔한 모습일 수 있다.
뜻은 몰라도 그림에서 풍기는 이미지 효과를 어렴풋이 감지하면 괜찮다. 글자체에서 우러나오는 뜻 모르는 의미도 느낌으로 독해하면 된다. 이해못할 담벼락 미술일지라도 이곳 골목의 뒷담화를 재미있게 풀어놓았겠거니 라는 어림 짐작 정도면 충분하다.
길거리에는 그들의 삶의 속살들이 맺혀있다. 하염없이 걷다보면 미처 몰랐던 이 곳만의 정서에 다가갈 수도 있다. 여행 발걸음은 느릴수록 주변 대상들을 바라보는 시야는 넓어지고 응시하는 폭은 깊어진다.
걷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걸으면 일단 자유롭다. 걷다가 쉴 수 있고, 보다가 멈출 수 있다. 내가 나의 행동거지를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조정할 수 있다. 여행지를 다니면서 체험하고, 생각하고, 사고하는 주도권은 걸을 때만 자신이 온전히 행사할 수 있다.
이동 수단을 자동차에 의존하면 자동차의 길에 온전히 종속되어야 한다. 중간에 멈칫멈칫 멈추기도 어렵다. 최종 목적지 도착만이 목적이된다. 좌우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앞만 보고 가야 한다. 길거리의 풍경들은 눈앞에서 어른거리며 재빨리 스쳐 지나간다. 보고 싶은 경치들도 찬찬히 바라볼 수 없다. 어느 순간 내 시야로 들어왔다가 어느 찰나 시야에서 멀어지고 눈앞에서 사라진다.
자동차를 떨쳐버리고 두발에 의존하면 모든 풍경이 달라진다. 거리의 풍경들이 또렷히 내 눈앞에 나타난다. 스치듯 흘러갔던 풍경들도 눈 앞에 또록하다. 잡고 싶지만 멀어져가는 아쉬운 경관들도 없다. 길거리의 풍경들은 내 눈에 모두 맺힌다. 내 눈 속에 들어온 장면들 중 이끌리는 장면들은 멈추어서 좀더 바라보면 된다. 걸음걸음마다 눈에 선명히 잡히는 길거리 장면들은 마음의 사색거리가 된다.
걸으면 즐거움도 배가된다. 골목, 거리 곳곳의 로컬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예기치 못한 재미난 풍경도 덤으로 건질 수 있고, 무엇보다 현지인들이 일상을 이어가는 생생한 현장과도 마주할 수 있다.
걷는 것은 길 위의 풍경들 하나하나를 제대로 감상하는 것이다. 볼거리 대상과 자신이 충실히 소통하는 것이다, 걸음걸이는 자신의 체력으로, 자신의 의도대로 행동하는 능동적인 움직임이다.
이동 수단으로서 발걸음의 유일한 단점은 느리다는 것인 데 역설적으로 그 단점이 큰 장점이 된다. 걸어야 길거리의 모든 광경들을 시야에 담을 수 있고, 걸음으로서 현지인의 체취를 맡을 수 있다. 느리게 걸어야만 현지인들의 삶의 편린들을 눈 속과 마음 안에 한가득 담을 수 있다.
걸을 때 눈에 들어오는 길거리의 수많은 풍경들은 우리들의 인식을 깊게 한다. 보는 족족 생각의 단편들이 머리 속에 차곡차곡 쌓인다.
장거리 지역간 이동은 차량류,단거리 지역내 나들이는 두 다리. 이것이 여행의 정석이다.
여행지에서는 길을 한번 잃어버려도 괜찮다. 한번 쯤은 배회하는 것도 좋겠다. 무엇이 그리 바쁜가. 잃은 길을 되찾으려 하지 말고 발길가는 대로 걸어보는 거다. 나중 걷다 걷다 지치면 대중 교통수단을 이용하면 된다. 지치기 전까지는 발길 가는 대로, 눈길이 끌리는 대로, 마음가는 대로 걸어보자.
목적없이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보는 재미도 솔솔하다. 판에 박힌 관광 루트로만 이동을 한정하면 재미가 덜하다. 색다른 경험 욕구가 있다면 정형화된 루트를 이탈해야 한다. 예기치 못한 장면들은 뜻하지 않은 발걸음에서 만날 수 있고, 현지의 감추어진 생생한 이미지는 자유로운 방황에서 포착할 수 있다. 길에 마주치는 현지인들의 일상의 역동성이 우리에게는 이색적인 경험이 되고, 우리와 다른 그들의 삶의 풍경이 우리에겐 타문화 체험이 된다.
여행 자체가 현실의 삶에서 이탈하는 것이고, 잠시나마 현실의 실제를 거스르며 존재해 보자는 것이 아닌가.
여행은 보는 것이고, 느끼는 것이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형화된 관광 스폿 중심의 체험은 밀도있는 여행 체험이 되기 어렵다. 사소하지만 일상의 다채로운 삶의 현장들에 다가가고, 그곳 사람들의 삶의 부대낌에 많이 접할수록 여행의 감상은 깊어지고 여운은 길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