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는 인어를 잡아 아씨를 삼을 수 있나? (정지용, ‘피리’)
인어. 외계인. 지구의 가족.
당신은 인어를 한 번 구경하고 싶어서 거센 바다로 한 번쯤 항해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인어가 갑자기 당신의 배에 올라타 당신의 집으로 함께 가자고 한다면? 당신은 ‘어..? 이건 내가 생각했던 게 아닌데…?’하며 허둥지둥 현실로 깨부수어져 들어갈 것이 분명하다. 그래, 나는 당신에게 인어였던 거지.
뻔하디 뻔한 첫 만남에 당신의 존재는 사실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매번 비슷한 만남이었고 기억할 만한 사건도 아니었으니까. 혹은 그런 걸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기엔 내 목소리가 점점 더 없어질 테니까. 당신은 그렇게 나에게 안절부절을 못하며 다가오더니 어느 날엔가는 사라져 버리곤 했고, 마지막까지도 참 불친절한 사람이었다. 인간은 원래 그런 건가? 어찌 둘도 없이 사랑했던 사람을 텍스트 몇 문장으로 지구 밖으로 쫓아내는 것인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서 이제 뭍으로는 꼬리가 닿는 것조차 불쾌할 지경이다.
언젠가 당신이 나를 보러 바다로 오겠다는 전화를 새벽에 했었다. 왜? 술을 마시지 않는 낮에는 내 목소리를 들을 면목이 없었던 거겠지. 술을 꾸역꾸역 먹고서야 겨우 인어를 마주할 용기를 얻는 거겠지. 그래, 얼굴 한 번 보자 하고 당신을 만나러 근해로 헤엄쳐갔다. 당신은 몇 년 전과 똑같은 사연 많은 얼굴을 하고서는 나와 함께했던 갖은 추억보따리를 꺼내 바다로 집어넣기 시작한다. 그런 잊혀간 기억쯤 다시 떠올려도 이미 바다엔 다른 이야기들이 많다. 우리의 추억쯤은 내겐 그냥 웃긴 해프닝이었다고.
당신을 보러 헤엄쳐가는 와중에 내가 당신을 왜 다시 만나러 가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난 당신을 사랑하던 때의 나를 사랑한다. 당신이 사랑했던 나를 나도 사랑한다고. 그래서 당신이 기억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궁금했다. 어떤 사람이었길래 그렇게 사랑했고 그렇게 도망치고 싶었고 그렇게 다시 보고 싶었는지 궁금했다. 당신은 나를 만나러 다음 주에도 그다음 주에도 바다로 오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거기에 덧붙일 말이 없었다. 당신은 뭍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다. 바다에서,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야 할 사람이다. 당신이 놓았던 그때처럼 당신 스스로 나가떨어져서 나를 놓아야만 한다. 그때까지 조용히 멀리서 당신을 지켜보는 게 인어의 품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