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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식 Jul 14. 2023

P&ID와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3악장

도면과 음악에서 사람의 마음을 훔쳐보다.

어제는 완전히 다른 영역에서 사람의 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7.13일 목요일 하루 동안 저는 40대 중반을 넘기고서야 비로소 철이 들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 기록에 남깁니다.


어제 7.13일 목요일에는 회사에서 공정위험성 평가의 초보자 전일교육으로 HAZOP Study라는 걸 했습니다. 오전에 도입교육을 마치고, 오후에는 8톤 노통보일러의 P&ID 도면을 가지고 해당 공정이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을 평가하는 실습이었습니다. 도면에서 계통도에 따라서 도시가스 공급라인, 연소용 공기라인, 스팀공급 라인, 보일러 본체를 4개소를 선정하고, 해당 라인에 대한 밸브, 인터록 구성에 대해서 차근차근 표를 채워가면서 HAZOP Study를 했습니다.


P&ID 도면은 누가 봐도 이해하기 힘든 표식, 숫자로 가득했습니다. 그 도면을 찬찬히 보고 읽어가면서 저는 어느덧 사람의 마음이 도면 뒤에서 보이는 듯했습니다. 밸브는 자동밸브가 아닌, ON/OFF Shut off 밸브였고, 유량을 제어하는 Control Valve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8톤 노통보일러를 운전하는 사람의 부단한 움직임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한시도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현장 판넬을 쳐다보며, 땀에 젖은 작업복으로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는 듯했습니다.


또한 투자비를 아끼고 싶은 사장님의 마음도 보였습니다. 큰돈을 들여가며, 설비를 구성하였지만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허용하고 설비는 항상 100% 가동상태를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은행에서 대출한 대출금과 회사 잉여금을 끌어모아서 마련한 설비를 100% 가동해서 직원들 월급 주고, 어려운 경제여건 속에서도 사업을 하는 사장님의 마음도 보였습니다. 최소한의 돈을 투자해서 최대한 성과를 내고 싶은 자본가의 욕심도 보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강사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노통보일러에서 연소 배가스의 현열을 활용해서 급수 온도를 올려주는 절탄기(Economizer)를 빼먹은 공급사 직원의 마음도 보였습니다. 최저가 입찰로 낙찰을 받아서, 설비를 구성해야 해서 법적인 안전장치는 최소한으로 설계하고 산업용 보일러에서는 응당 있어야 할 절탄기를 수익성 때문에 설계에 반영하지 않았습니다. 공급사에서는 거의 사기에 가까운 행동을 하였고, 그 마음도 보였습니다.


P&ID 도면에서 공정위험성 평가도 보였지만, 그 뒷면에서 제가 본 건 땀에 젖어 뛰어다니는 직원의 마음, 새로 산 설비로 최대한 수익을 내고 싶은 사장님의 마음, 돈 때문에 엔지니어로서의 양심을 저버리고 사기를 친 공급사 직원의 마음이 하나씩 보이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교육을 마치고, 19:30분에 포항문화예술회관에서 클래식 연주회에 다녀왔습니다.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과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이 연주되었습니다. 신성희 바이올리니스트의 열정적인 연주와 앙코르로 1부를 듣고, 잠시 인터미션에서 쉬고 2부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을 들었습니다. 2악장이 한창 연주되는 중에 나는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눈을 떴는데, 지휘자 좌측면에 1,2번 바이올린 연주자들에서 음계가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비올라 연주자들에서도 음표들이 통통 튕겨져 나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휘자는 그 8분 음표, 16분 음표들을 이리저리 지휘하는 게 보였습니다. 마치 악기 하나에서 콩나물 대가리를 하나씩 쏟아내는 폭포수와 같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3악장이 시작되었습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습니다. 바이올린이 아름다운 연주를 시작하고, 그리고 뒤이어 클라리넷 연주가 바통을 이어받아서 주제를 계속 연주합니다. 2악장에서 음표들이 하늘을 날았다면, 3악장에서는 음표들이 잔잔한 호수에 하나씩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저는 그 음표의 빗방울에 젖어서 음악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저는 3악장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후회 없이 사랑을 했지만, 결국에서는 헤어질 수밖에 없는 사람의 마음처럼 느껴졌습니다. 후회 없이 사랑했던 내 마음과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했지만 떠난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는 그 마음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제가 지금 있는 공장을 떠나게 되는 그날에 꼭 듣고 싶은 곡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21:30분까지 연주회를 들으며, 집으로 향했습니다. P&ID도면과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3악장에서 저는 사람의 마음을 느끼고 훔쳐보았습니다. 무미건조한 도면과 알 수 없는 음표에는 그걸 디자인한 사람의 마음이 들어있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읽고, 느껴볼 수 있는 7.13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회사에서나 집에서나 사람들의 마음을 읽고, 공감하는 삶을 살아보려 합니다. 결국 사람의 마음을 읽고, 공감하고 살아가는 일이 인생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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