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보다 슬픔이 나를 위로한다.
나는 인디음악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내 음악 플레이리스트에는 최신유행 TOP100보다는 인니밴드 노래들이 늘 들어있다. 최근에는 9와 숫자들이라는 인디밴드 노래 중에서 "평정심"이라 노래를 즐겨 듣는데, 세상살이에 지쳐있는 곤고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듯해서 가슴으로 듣는 노래이다.
이 노래는 도입부부터 다짜고짜 이렇게 시작한다.
"방문을 여니 침대 위에 슬픔이 누워 있어 그 곁에 나도 자리를 펴네
오늘 하루 어땠냐는 너의 물음에 대답할 새 없이 꿈으로"
저마다의 삶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살다가 집에 들어와 방문을 열어보니, 침대 위에 슬픔이 누워 있다.
그리고 나는 슬픔이 누워 있는 그 곁에 자리를 편다. 슬픔은 나에게 오늘 하루가 어땠다고 물어보지만,
난 그 질문에 대답할 새 없이 너무나 지쳐 잠을 잔다.
그리고 이어지는 가사는
"아침엔 기쁨을 보았어 뭐가 그리 바쁜지 인사도 없이 스치고
분노와 허탈함은 내가 너무 좋다며 돌아오는 길 내내 떠날 줄을 몰라 "
아침에 일어나서 각자 삶의 현장으로 가는 길에 반가운 기쁨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기쁨은 늘 바빠서
나랑 인사도 없이 그냥 스치고 만다. 하지만 분노와 허탈함은 내가 너무 좋다고 저녁에 돌아가는 길 내내
나를 떠나지 못하고 따라다닌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기쁨을 잠시 만나게 되고, 저녁에 돌아오는 길에는 기쁨은 보이지도 않고, 분노와 허탈함이 나를 따라다니고 있다.
"평정심 찾아 헤맨 그이는 오늘도 못 봤어 뒤섞인 감정의 정처를 나는 알지 못해
비틀 비틀 비틀 비틀 비틀거리네 울먹 울먹 울먹이는 달그림자 속에서"
내가 오늘 하루 종일 찾은 건 평정심이었다. 나를 기쁨과 슬픔, 분노와 허탈함에 빠지지 않고 기쁘거나 슬퍼거나 분노하거나 허탈하지 않을 만큼 감정의 기복을 느끼지 않는 평안하고 고요한 마음인 평정심을 찾아야 하는데, 나는 하루의 모든 감정이 뒤섞여 있고, 그 감정이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 그 정처를 알지 못하겠다. 그래서 나는 평정심을 찾지 못하고, 늘 돌아오는 저녁 길에는 울먹 울먹이는 달그림자 속에서 비틀 비틀 거리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역시 내게 너만 한 친구는 없었구나 또다시 난 슬픔의 품을 그렸어
내일은 더 나을 거란 너의 위로에 대답할 새 없이 꿈으로"
그렇게 울먹이는 달그림자 속에서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와서 방문을 열어보니 나에겐 역시 슬픔만 한 친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슬픔의 품을 그렸다.
그리고 슬픔은 나에게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을 거라는 위로에 대답할 새 없이 다시 꿈으로 가버린다.
우리의 삶을 위로하는 건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라고 한다. 슬픔이 "오늘 하루 어땠냐?"라고 나에게 물어보고
슬픔이 "내일은 더 나을 거"라고 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어온다. 그래서 슬픔의 품을 그릴 수 있게 된다.
여기서 품은 "두 팔을 벌려서 안을 때의 가슴"을 사전적으로 의미하는데, 슬픔이 나를 안아주는 가슴이 된다는 표현을 슬픔의 품이라고 시적으로 표현했고, 나는 슬픔의 품을 그렸다고 말을 하는데, 너무나 아름다운 가사이다.
세상에 지친 우리의 영혼을 위로하는 건 슬픔이고, 슬픔은 늘 우리를 그 품으로 우리를 안아주고 위로의 말과 포옹을 해준다. 내가 그토록 찾는 기쁨은 늘 인사도 없이 나를 스치고 지나가고, 분노와 허탈함은 돌아오는 길 내내 떠날 줄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울먹이는 달그림자 속에서는 비틀비틀 거리며 걸으면서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슬픔을 보며 너만 한 친구가 없구나.. 슬픔의 품을 그려본다.
잠시 스치는 기쁨.. 오늘도 찾아보지만 보이지 않은 평정심 대신에 나는 나를 위로해주는 슬픔의 친구와 더 잘 지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