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착한 아이 컴플렉스' 딸의 꼬인 마음

동생아, 넌 참 편하구나

by 염소

'착한 아이 컴플렉스' 딸의 꼬인 마음

<편집자주>

착하지 않은 내게 착한 딸 컴플렉스가 있었던 거 같다. 본성과 상관없이 많은 맏딸 친구들이 겪는 현상이다. 착하긴 해야겠는데, 이 집안 질서가 마음에 안들었다. 나는 엄마 일을 덜어주려 남동생 밥을 차려주는데 엄마는 동생 학교 갈 도시락까지 싸주겠다 선언한다. 뒤늦게 아빠 병세의 심각성을 안 동생이 충격을 받자 모두가 동생을 걱정한다. 속에 열불이 나 쓴 일기들이 참 많다. 사랑하는 마음과 감사함, 죄책감, 안쓰러움, 억울함, 부담감, 불안, 그 모든 게 섞인 복잡한 감정이었다.



2018년 9월 ㅇ일


모든 것은 엄마의 업보다.


엄마가 걱정된다 해서 내가 우리집 제2의 엄마가 될 필요는 없다. 가족을 위한 희생을 선택한 건 엄마지 내가 아니다. 민수(동생 가명) 버금가는 '쌍놈’이 돼야 내 삶을 살지. 나랑 상관없는 일이다. 가족과도 거리가 필요하다.



2019년 1월 18일


엄마가 공부하는 민수 도시락까지 싸주겠다고 한다.


꼬박꼬박 시간 내서 아빠 밥 차려드리고 심지어 어제는 민수와 빠를 위해 차례로 밥 차려주고 설거지까지하고 공부하러 간 내가 너무 등신으로 느껴진 순간이다.


난 고3 때도 이 정도 수준의 '케어'를 받은 적이 없는 거 같다. 그리고 취준생인 지금도 마찬가지다. 돈도 안버는 백수, 집에 있을 시간도 많은 백수이니 지금 더 집에 잘해야겠다 생가갛고 노력하고 있다.


돌아오는 건 ‘넌 알아서 잘 하니까, 엄마의 빈자리까지 채워서 아빠, 남동생까지 잘 챙기라’는 무언의 압박.


나는 꼭 편한 일자리 말고 극한으로 힘들어서 집에 얼굴도 못비추는 기자가 될 거다. 집에선 아무 도움 안받을 거고, 나 역시 제2의 엄마 역할 같은 거 결혼 전부터 할 생각 없다. 아니, 결혼도 평생 안해야겠단 생각까지 드는 요즘이다. 엄마와 다른 인생을 살 자신이 없어서.



2019년 2월 ㅇ일


작년 4~5월쯤 내게 우울증 비스무리한 증세가 왔다, 잘 극복해낸 지금은 민수가 아프다.


민수가 갑자기 아프게 된 건 아빠의 병세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이제야' 알게 됐기 때문이다. 평소 아빠와 밥 먹을 일이 잘 없는 민수가 며칠 전 아빠 제안으로 집앞에서 외식을 했나 보다. 아빠는 열 걸음 걸으면 쉬어야 한다. 오르막길에선 두세 걸음으로, 한걸음으로, 쉼의 간격이 줄어들고 숨도 거세게 몰아쉬어서 주변 사람들이 쳐다볼 정도다.


근데 아빠가 그렇게까지 못 걸을 줄은, 그렇게까지 숨이 안쉬어질 줄은 몰랐었나보다. 충격받은 민수는 정신과 진료까지 갔다. 엄마 말로는, 상담 중 아빠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민수가 꺼이꺼이 울었다고 한다.


솔직히 힘든 건 알겠지만. 넌 이제야 알아서 참 편하구나, 생각했다.


나에겐 1년도 더 된 일이다. 아침에 자고 있는데 출근 준비하는 아빠의 기침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의사가 이야기했던 '더 이상 좋아질 수 없고 악화되기만 할 거'라는 아빠의 병이 그날 아침 훅 가까워졌다고 느꼈다. 너무 눈물이 나서 거실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 뒤로 나는 아빠가 출근 준비하며 기침을 할 때마다 신경이 곤두서서 위가 쓰려왔다. 몇 달 간은 길 걸어가다가도, 버스 타고 가다가도, 눈물이 주륵주륵 나는 이상한 증상이 나타났다.


민수는 아직 젊고 군대 복무 기간이 끝나면 나아질 것 같긴 한데, 아빠는 자신 때문에 아들이 아프다는 소리에 너무 큰 상처와 충격을 받은 거 같다. 저녁 먹으며 그걸 또 내게 말씀하시고… 왜 나는 괜찮을 거라 생각하시는 건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아빠에게 그냥 지금처럼 운동하고, 밥 잘먹으면 그걸로 됐다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민수가 걱정돼서기도 하지만 당장 아빠의 몸 상태가 너무 힘들어 보여서, 너무 건강한 내가 “이렇게 하면 괜찮을 거야”, “힘내”라고 말하기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을 거 같았다. 나는 아빠 때문에 또 마음이 아프다.


가족… 가족이란 울타리는 여러 외부 환경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준다.


하지만 가족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가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보다 몇배는 크게 다가와 나를 뒤흔든다



2019년 3월 ㅇ일


운전 재밌다! 빨리 배워서 엄마 아빠 태우고 다녀야지!!! i’m the best driver~



2019년 6월 3일


일기장을 하나 사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루가 너무 의미없이 흘러가는 게 무서운 요즘이라서.


지금도 인생의 나름 중요한 한 페이지인데.. 아빠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나날이고 취업 준비에 시달리고 있긴 하지만 꿈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모두 '어른의 나'를 만들어 가는 과정인데.


약 3년 간 분명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런데 난 이 시기를 그저 정체된 시간, 멈춰버린 시간, 버린 청춘…정도로만 생각한 것 같다. 기록이라도 해야 나중에 이 시기가 정말 ‘잃어버린 N년’이 되지 않을 거 같다.


매일의 일상과 작은 변화, 성취, 감정을 기록하자. 특히 아빠와 함께 하는 시간을 잘 기록해두자. 취업하면 오히려 나와 내 주변에 이렇게 많은 관심을 갖지 못할지도 모른다. 옛날엔 분명 했지만 최근 3년 간 하지 않은 고민들, 내 삶의 목표는 무엇이며 무엇이 행복이라 생각하는지 등을 풀어 넣어보자. 오늘도 하루가 의미없이 흘러간 것 같지만, 일기를 통해서라도 돌아봤으니 다행이다.



2019년 6월 8일


내일 아빠가 폐 이식 수술 가능 여부 검사를 하러 입원한다. 이미 작년 초부터도 늘 생각해왔던 일이고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도 많이 해왔다. 그래서인지, 매우 덤덤하다. 어찌됐든 우리가족이 잘 헤쳐나갈 수 있는 만큼의 시련이었으면 좋겠다.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닥쳐올 것이다, 내 자신을 믿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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