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안남은 시간인 줄도 모르고
(발행 순서가 잘못되었습니다..
'<4>나는 매일 아빠와 밥 먹으러 집에 간다'를 먼저 읽고 와주세요!)
취업의 관문을 나는 왜 이렇게까지 돌아갈까란 생각이 나를 짓눌렀다. 한달 간은 아빠와 잘 마주치지 않았다. 괜찮냐고 물을까봐도 싫었다. 그냥 혼자 있고 싶었다. 나는 그게 얼마 안남은 시간인 줄도 몰랐다.
내일 쯤이면 인턴 중 정규직 전환을 위한 면접 대상자가 발표될 거 같다. 취업 준비 기간 3년을 통틀어 요 며칠이 가장 절박하고, 떨리고, 간절하다.
인턴 경험은 긴 취준으로 죽어있던 내 안의 세포들을 깨우는 시간이었다. 사회 생활을 하고, 시간에 맞춰 일하고.. 거짓말 안하고 모든 게 재밌었다.
무엇보다 모든 고민이 '내 고민'이라는 사실에 감사했다. 선배, 동료들과의 관게에 대해 고민하고, 일하다 부족함을 발견해 자책도 했지만 새로운 자극으로 느껴져 즐거웠다.
그간 긴 취준에 나를 잃어버린 것만 같아 불안했다. 그래서 내게 온전히 집중하고 일에 파묻히는 시간이 좋았다. 내일 정규직 전환 대상에서 떨어진다면 나는 예전의 나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다시 매일매일 아빠와의 점심과 저녁을 걱정해야 하는 시간으로.
돈을 번다는 게 그렇다. 번듯하게 나가서 일하고 오면 집에 좀 신경을 덜 써도 될 거 같은 느낌이랄까. 신경은 덜 쓰는데 가족과의 대화는 한결 가볍게, 많아졌다. 오늘 하루 아빠가 밥을 잘 먹었는지가 아니고 미주알고주알 오늘 내게 있었던 일, 회사에서 힘들었던 일을 말하니 좋았다.
근데 공부만 하면 어쩔 수 없이 내가 가장 한가한 사람이 된다. 오늘 아빠가 밥을 균형있게 먹었는지, 운동은 했는지가 내 최대 관심사가 된다.
오롯이 ‘나’대로 살 수 있는게 사회적 일이 주는 매력이 아닐까.
난 오늘밤 너무 떨려서 잠을 못잘 거 같다.
채용 전환 탈락 후 하루하루를 쥐어짜듯 산 지 수일이 지났다.
종각 스터디 카페에 틀어박혀 마치 ‘누가 나 좀 위로해주세요’ 하고 앉아있는 거 같다. 그렇지만 진짜 달려와 위로해주는 사람은 없다. 내가 이렇게 외로운 사람이었나 싶은데, 이는 전부 내가 자초한 결과다. 힘든 얘기를 잘 안꺼내는 나는 진짜 도움이 필요해진 지금, 누구에게, 어떻게 위로해달라고 해야 할지조차 모르겠다.
힘든 마음에 어젠 유튜브로 타로점까지 봤다. 지금 내 상황을 정확히 맞혔다. ‘지금 내가 제일 잘 한 일’을 묻는 타로점이었는데 패배자 카드가 나왔다.
지금 내 상황은 예기치 못한 실패와 좌절로 최악이라고 했다. 너무나 상처 받아서 힘든 상태. 근데 그게 내 잘못이나 실수로 일어난 일이 아니고 '그냥 일어난 일'이라 더 배신감이 들고, 화나고, 마음이 많이 다친 상황이라는 설명도 있었다. 상처로 피폐해진 내 상황을 정확히 맞혔다.
그런데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게 있다고도 나왔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 절망에 와르르 무너졌을텐데 어떻게든 평정심을 유지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폐 끼치지 않으려 한다는 거다. 맞나? 나는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않고 종각 스터디 카페의 칸막이 책상 한칸으로 숨어버리길 택하긴 했다.
그리고 조언카드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최소한의 일상을 유지하고 마음을 회복하라고. 내 탓도 아닌데 만회하거나 더 잘하려고 애쓰는 건 좋지 않다고 했다.
함께 일했던 A는 연락도 없이 잠수고, B는 매일 SNS에서 운다고, 힘들다고, 자신의 상태를 보고한다. 각자의 방법으로 도피든, 치유든, 괴로워하든, 이 시간을 버티고 있다.
부정적인 생각이 머리를 뒤덮었던 얼마 간은 일기를 쓰고 싶지 않아서 비워뒀다. 인턴이 끝난 지 정확히 한달이 지났다. 그 사이 합격한 친구들은 일을 시작했고 남은 사람들은 ‘존버’를 시작했다. 나의 존버 모드는 옛날과 많이 달라졌다.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시간을 유동적으로 쓴다는 것이다. 이전엔 점심, 저녁 집에서 아빠와 먹는 걸로 못박아 두고 시간을 배분했는데. 지금은 자는 시간, 먹는 시간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공부하고 싶을 때 공부하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는다.
그리고 방에만 쳐박혀 있다. 불규칙하고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이 방식은 아직까진 정말 최고다. 내 컨디션대로만 사니 집중도 잘되고 우선 순위대로 일을 빨리, 효율적으로 해결하게 된다.
다만 내 방은 내 세계의 전부가 됐다. 거실이란 반(半)사회적 공간에서 가족과 얘기하고 같이 밥먹는 시간은 거의 사라졌다. 일어나면 바로 책상에 앉아 공부를 시작하고, 밤에도 그냥 내킬 때까지 공부하다 자고 싶을 때 잔다.
하루종일 아빠랑 한 집에 같이 있는데도 절대 밥먹는 시간이 겹치지 않는다. 옛날엔 같이 먹지 않는게 미안했지만, 지금은 내가 이렇게 나를 챙겨야겠다. 혼자 있을 때 가장 편하고 불안하지 않다. 부모님의 걱정과 안쓰러움을 듣는 것보다 그냥 혼자 있는게 내가 무너지는 걸 막을 수 있을 거 같다.
올해를 채우면 취업 준비만 3년이다. 평균 입사 나이를 넘기게 되는 것. 심지어 회사를 다닌 것도, 대학원을 다닌 것도 아닌데 언론 준비에 올인했으면서도 아직 이러고 있단 사실이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자꾸 떠오른다. 나와의 고독한 싸움이다.
흔들리지 말고 나를 완성하자.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완성해가는 일이다. 그 중간 단계에 기자란 직업이 있는 것 뿐인데… 이게 참 쉽지가 않네. 이리 오래 걸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도 할수록 확신은 커진다. 나중에 다른 일을 하더라도, 이 일은 반드시 내 인생 커리큘럼에서 나를 완성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일이라고.
동굴 속에 들어간 지 한달, 그해 10월 말 아빠는 전화 한통을 받았다. 폐 이식 수술을 드디어 할 수 있다고. 근데, 당장 '내일' 입원하라는 통짖를 받았다. 폐이식 수술은 간 이식과는 비교할 수 없게 위험한 수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