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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영 May 23. 2021

사랑, 그 너머에는

검정치마 - Love Is All

Love is all, all is love, love is all.
사랑이 전부인 거야.


써야만 하는 사람들은 써야 하고* 알고 보니 나는 번거롭게도 그 부류의 인간이었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잘' 뱉어내 보려니까 연습이 절실했고, 그래서 시작한 매일 글쓰기 프로젝트 '재영의 플레이리스트(舊 음악으로 기억하기)'가 어느덧 네 달여가 되어 백 편을 넘었다. 정말 감사하게도 턱없는 글에 응원을 보내주는 자애로운 분들이 꽤 되었다. 분에 안 맞는 칭찬들 속에 따꼼한 피드백들도 있었는데, '왜 죄다 사랑 얘기야?'가 그중 가장 많았다. 

오 년쯤 되었나, 슬금슬금 작곡을 시작했을 무렵 자취방에서 함께 술을 먹던 후배 하나가 말했다. "형은 왜 사랑노래만 써?" 그러게, 왜 나는 오 년 전에도 지금도 주구장창 사랑 이야기만 하고 있을까. 부모님께도 아직까지는 창창한 아들내미 혼삿길 혹여 스크래치라도 날까 옛사랑 얘기는 구태여 끄적이지 말라고 핀잔 아닌 핀잔을 들은 터였다. 살짝 주눅이 들어서, 그럼 사랑 너머에는 어떤 고귀한 것이 황금으로 각인되어 있을지를 각 잡고 (살짝은 염세적인 태도를 견지한 채로) 고려考慮해봤다.


온갖 차별로 고통받는 사람들, 불합리에 분노하고 맞서는 태도, 인간관계에서 오는 시답잖은 스트레스들, 여기저기 치인 자아에게의 위로, 자연의 위대함과 숭고함, 미래의 불확실함과 과거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현재에 대한 만족과 불만족. 삶을 대하는 바람직한 자세 등등.

철학에 젬병인 터라, '나는 무엇을 위해 적고, 노래하는가'는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거쳐서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지나 '나는 왜 오늘 점심으로 오삼불고기를 먹었고 두 시간 후에 화장실을 갔는가'로 귀결됐다. 결국 개똥이 되었지만 오랜만에 진지한 생각을 하니 뭔가 배가 고파져서 라면을 끓였다. 한소끔 끓인 꼬들꼬들한 면을 후루룩하니 행복했고, 동시에 놀랐다. 이렇게나 단순한 동물이라니!

애초에 깜냥에 맞지 않는 너무 복잡하고 심각한 문제였지 않나 싶었다. 그래서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모든 것은 사랑의 일이라고. 인류애와 자기애로부터 모든 문제와 해답이 비롯된다고. 얼추 생각해보니 위에 적은 '사랑보다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들'에도 적용 가능한 듯했다. 차별과 불합리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쓰는 것도 인류애에 관한 일이고, 자아를 다독이고 충만한 삶의 시간을 노래하는 것은 자기애에 관한 일이 아닌가. 면은 진작에 사라진 냄비 속 벌건 국물을 보며 생각하다 문득 더 고민하면 또 배가 고파질 것 같아서, 사랑의 문제가 사랑 이외의 모든 문제를 다루게 된다는* 말이 백 번 천 번 옳다고 믿기로 했다.


이쁘게 매듭지지 못한 채 지나가버린 사랑들을 혼자라도 다시 묶다보면 혼잡한 마음도 언젠가는 차분할 테고,
있을 법한, 겪어보고 싶은 애정사를 꾸며 내다보면 아직 불투명한 이상향의 사랑도 정리되지 않을까.
그러고 나면 인류애나 자기애 같은 거대한 것들도 품을 수 있는 인격체가 되어 있을 거라는 걸.

(확실하지 않지만) 사랑 그 너머에는 결국 사랑일 테고,

그래서 나는 내일도, 사랑을 이야기하겠다.



* 장강명, 책 한번 써봅시다, 2020, 한겨레
* 김금희, 사랑 밖의 모든 말들, 2020,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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