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 도약의 비밀, 클래식의 힘
언뜻 봤을 때 이 네 가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듯하지만 영어권 국가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모차르트의 음악, 셰익스피어의 5대 희극, 디즈니 영화, 빅맥, 모두 클래식(Classic)이라고 부를 것이다. 바로크 등 클래식 음악, 그리고 고전문학은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라이온 킹은? 많은 미국인들은 라이온 킹을 비롯해 여러 세대에 걸쳐 수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은 영화들을 흔히 디즈니 클래식("Disney classics")라고 부른다. 빅맥도 역시 세계 최대의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의 가장 대표적인 메뉴로 이 또한 맥도널드 클래식("McDonald's Classic")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옥스퍼드 영사전에 의하면 Classic은 최고 수준의, 혹은 가장 대표적인, 상당히 혹은 가장 높은 수준의 예술 작품을 뜻한다. 어원으로는 불어의 "classique" 그리고 수준, 말 그대로 어느 정도 (가장 높은) 클래스에 속한을 의미하는 라틴어 'classicus'이 있다.
현대 사회에서 Classic (이하 클래식)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 오케스트라와 오페라와 같은 클래식 음악 장르가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클래식은 음악뿐만 아니라, 호메루스부터 조지 오웰과 C.S. 루이스까지 이르는 고전문학, 미술작품, 세대를 넘나들며 사랑을 받는 영화와 대중문화, 음식, 심지어 엘 클라시코,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등 "명승부"라는 의미의 스포츠 경기까지 넘나드는 개념까지 담고 있다. 한마디로 클래식은 문화와 세대의 장벽을 넘나들면서 폭넓은 범위의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가장 높은 수준의 문화 현상이다. 미국과 영국 등이 여전히 문화와 학문 등 소프트파워 최강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가장 단순한 이유는 클래식의 역사가 오래되었고 여전히 많은 클래식을 생산해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클래식이 인문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건 분명하다. 원래 클래식은 대학교에서 서양 고전문헌('Classics' 혹은 'Classical Studies' 등)이라는 분야를 뜻했다. 인문학의 꽃이라고 불리는 서양 고전문헌학은 옥스퍼드 대학에서는 여전히 "Greats", 위대한 작가들의 글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불린다. 대표적으로 호메루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우스, 오이디푸스 등 그리스 비극과 같은 작품들, 플라톤과 키케로 등 고대 그리스 로마 철학자들과 역사가들이 남긴 문헌들도 포함된다.
클래식은 여전히 셰익스피어, 제인 오스틴, 헤밍웨이 등 고전문학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쓰인다. 그러나 그 외에도 음악, 그리고 피카소 이전 고전 미술작품들도 클래식이라고 부른다. 19세기부터는 더 나아가 다른 학문에서도 클래식이라는 타이틀이 붙기 시작했다. 애덤 스미스가 처음 창시한 경제학은 오늘날 학자들은 고전 경제학(Classical Economics),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완성된 이론들을 종합해서 고전역학(Classical Mechanics)라고 부른다.
하지만 클래식은 더 이상 역사라는 판테온에 헌액 된 예술 작품과 위인전이 있을 법한 인물들이 남긴 업적에 국한되지 않는다. 라디오에서 비틀스나 퀸 같이 부모님 세대가 열광했던 밴드들의 명곡이 흘러나오면 "It's a classic!"이라는 감탄사를 쉽게 들을 수 있다. 청년들과 부모가 함께 들어왔던 오래된 노래나 영화뿐만 아니라, 디즈니의 겨울 왕국 혹은 스타워즈 정도로 많은 관객들과 비평가들의 사랑을 받는 작품이 출시되면 이들은 언젠가 클래식이 될 것이다, 클래식으로 기억될 것이다는 영화광들과 유투버들의 평을 적지 않게 들을 수 있다. 다스 베이더와 엘사가 오디세우스와 오이디푸스와 나란히 역사에 남게 될 것이란 뜻이다.
클래식을 영한사전에 검색하면 반드시 "고전"이라는 해석이 나오는데, 대부분 국어사전에 "고전"이란 단어를 검색하면 "수준 높은 예술작품" 정도의 의미가 나온다. 영어 클래식에 비해 활용 시 전달되는 의미의 폭이 상당히 좁은 걸 알 수 있다. 한국어로 "고전"이란 말을 듣는다면 대부분 사람들은 눈을 돌리거나 하품이 절로 나올 것이다. 영어 동의어인 클래식과는 다르게 "고전"은 의미가 현저히 제한적이다. 많은 이들에게 고전은 그저 옛날 것에 불과하다. 올드보이나 기생충 같이 전 세계 관객과 비평가들의 사랑을 받는 영화들이 고전으로 기억될 것이라는 말을 들으면 무언가가 이상하다.
너무나 안타까운 건 이는 단순한 언어적, 문화적 차이 이상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한국이 내놓는 대부분의 문화적 산출물이 과연 클래식으로 남을 것들이 얼마나 될지 생각해보면 사실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한국은 여전히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했고, 한국인들조차 우리들의 고전 문학작품과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현저히 부족하고 이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케이팝, 케이 드라마 등 한국의 문화 콘텐츠가 어느 때보다 많은 이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지만, 과연 20년 후에 우리 자녀들은 방탄소년단의 노래를 들을까? 오래전부터 한 곡의 노래가 1년 이상 지나면 어쩔 수 없이 "옛날 노래" 딱지를 받게 된다.
2000년대 중반부터 한국 기업들 사이에 갑자기 인문학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마크 주커버그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원어로 읽는 걸 즐기고, 구글조차 신입사원들 중 대부분을 학부 때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들을 선발하게 된다는 기사들이 생각났다. 서점에는 어느 순간 "정의란 무엇인가", "총 균 쇠" 같은 책들이 베스트셀러 선반에 올라가 있고, 심지어 노량진 학원강사들도 인문학 강좌를 팔기 시작했다.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들도 신입사원을 선발할 때 인문학 시험을 치기까지 시작했다.
그러나 정말 아이러니한 건 대학에서는 여전히 인문사회 학과들이 문을 닫고 통폐합되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 역시 당시 인문학 열풍에 휩쓸려 인문학과 고전에 눈을 뜨기 시작했는데, 다수의 인문학 서적을 내고 강사로 이름을 떨친 Ohmyschool의 모 강사는 예비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독서에 대한 강의를 한 적이 있었는데, 고전은 절대로 읽지 말라는 조언을 전한 적이 있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과 그 중요도가 어느 정도 인지되고 있지만, 당장 돈이 되지 않는 인문학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한국이 진정으로 선진국 반열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산업과 제조업이 아니라 문화와 학문 분야의 강자가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업이 아니라 학자들이 주도하는 인문학에 대한 공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윤을 창출하는 상품, 콘텐츠를 만드는 게 아니라, 배움을 위한 배움, 인간과 그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행위로써의 인문학적 연구와 활동이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우리나라가 클래식을 만들어내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한국 정규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appreciate"이라는 단어를 처음 배웠을 때가 다 기억날 것이다. "Thank you, I really appreciate it." 옥스퍼드 영사전에 의하면 "appreciate"는 동사로서 무언가의 완전한,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다, 혹은 어떤 것이 의미 또는 시사하는 바를 이해한다는 뜻이다. 한국어로 "감상하다"라고 해석된다. 국어사전을 검색해보면 "감상하다"의 사전적 의미도 "appreciate"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I can appreciate Classical Literature"와 "고전문학을 감상하다" 두 문장이 내뿜는 뉘앙스는 완전히 다르다. 우리 언어에는 새로운 문화, 좋은 예술작품, 글 등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이해하고 이에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스트롱 파워와 소프트파워 모두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정규 교육 시스템은 문제가 많기로 비판을 굉장히 많이 받지만, 한 가지 정말 잘하고 있는 건, 학생들이 어릴 때부터 고전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도록 가르친다.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게 미국 중고등학생들이 모두 호메루스나 셰익스피어의 글을 해리포터처럼 즐겨본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다만, 이들은 영어 수업을 듣게 될 때부터 고전으로 책을 읽는 훈련을 받게 된다. 한 마디로 글을 "appreciate"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는 뜻인데, 차이점은 여기에 있다.
한국 고등학생들도 국어 수업 시간에 홍길동전과 토끼전과 전우치전 등을 접하게 된다. 그러나 국어 교과서에 수록된 발췌본만 보지 한 작품을 책으로 받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감상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어떠한 글이나 문학 작품을 읽든지 간에 이들을 "understand"하고 "comprehend"는 하더라도 절대로 "apprecate"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실제로 언어영역에서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서 책을 읽고 있다면 대부분 학원 강사는 당장 그만하고 기출문제나 더 풀어라고 조언할 것이다. 인문계 고등학교의 교육 목적은 대학 진학을 준비시키는 것이고, 대학 진학을 결정짓는 수학능력시험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문학과 고전은 환영을 받지 못하니, 이러한 교육을 받은 기업인, 사업가와 대중 예술인들 역시 생존에 도움이 되는 수준 이상의 공부는 추구하지 않게 되는 건 놀랍지가 않다.
과거의 클래식에 대한 "appreciation"이 없이는 결코 새로운 클래식을 만들어낼 수 없다. 스타워즈의 크리에이터로 역사에 영원히 이름을 남기게 된 조지 루카스 감독은 첫 번째 시나리오를 작성하기 전에 다양한 문화의 신화와 수많은 고전 문학 작품들을 연구했다. 여기에는 아더 왕의 전설, 그리스 영웅 서사시, 반지의 제왕, 존 밀턴의 실낙원, 심지어 일본 사무라이 전기들도 포함된다. 스타워즈의 주 내러티브는 가장 폭넓은 스토리의 형태인 영우의 여정("the Hero's Journey")의 구조를 갖추고 있고, 광선검을 휘두르고 레아 공주를 구하고 제다이 기사가 되는 루크 스카이워커의 모습을 보며 누구나 공주를 구하는 중세의 기사가 보이고 스승은 요다를 보면서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를 지도한 인물인 멘토가 보인다. 스타워즈의 가장 중요한 소재 중 하나가 제다이 기사의 힘의 원천이 포스다. 포스는 단순히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의 힘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실제로 조지 루카스는 불교 등 다양한 종교를 연구해 어떤 모양이든 신앙을 가진 거 어떠한 관객도 공감할 수 있는 현대 신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고, 스타워즈가 세대와 국경을 뛰어넘으면서 가장 성공적인 영화 프랜차이즈가 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처럼 재미를 뛰어넘어,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클래식이 나오기 위해서는 과거의 클래식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와 이해가 필요하고 수많은 질문들이 던져져야 하는데, 이는 해리포터, 디즈니 만화영화와 가장 최근에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모두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10년 안에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을 때 대부분 미국 국민들은 열광했지만 혈세 낭비라는 비판도 결코 적지 않았다. 실제로 베트남전이 장기화되고 있고, 미국은 여러모로 혼란기를 겪고 있어, 눈앞에 해결해야 할 더 현실적인 문제들을 많이 눈 앞에 두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1969년, 인간이 비행에 성공한 지 100여 년 즈음되었을 때 인간은 지구의 궤도를 벗어나 다른 천체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달에 가서 얻어온 거라고는 월석 몇 개 밖에 없었지만, 달 착륙은 수많은 미국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많은 이들은 이제 이 전에는 꾸지 못했던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필자에게는 대학에 진학해서 역사나, 문학이나 철학을 공부하는 게 인간을 달나라에 보내는 것과 큰 차이 가 없다. 취업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보고 전공을 선택하는 자는 월급을 받게 되는 순간 상상력이 멈추지만, 진정 배움을 위한 배움을 추구하는 학생은 세상이 변화될 때까지 상상이 멈추지 않는다. 한국전쟁 후 우리 선조들은 생존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부를 해왔지만, 우리 학교는 여전히 잘 먹고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일군을 양성하는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경제성장률과 GDP와 같은 수치가 아니라, 로마와 대영제국, 미국처럼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는 나라가 되는 상상을 할 때가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