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쿠데타 실화임?
그것은 바로 '쿠데타'입니다!
이에 불만을 가진 시민들은 88년 8월 8일, 이른바 '8888'항쟁을 일으켰고 대규모 시위와 함께 아웅산 수 치가 민주화 운동에 전면에 나서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뜨거웠습니다. 그리고 결국 1990년 아웅산 수치가 결성한 NLD가 총선에서 82%의 압도적인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대승을 거두었지만, 군부는 선거 결과를 무효화시켰고 독재는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기적은 다시 일어났습니다. 2015년에 총선에서 수 치가 이끄는 NLD가 상, 하원 491석 중 390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면서 53년 만에 군부 독재는 마침내 막을 내렸고 민주주의를 되찾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군부에서 제정한 헌법에 따라 상, 하원 의석 수 중 25%는 군부에 할당되었고 국방부, 내무부, 국경경비대 등 주요 3개 부처 장관 지명권 또한 군부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헌법 개정은 의원 75% 이상의 동의를 받아야 하므로 개헌 가능성도 완전 차단되어 문민정부로의 온전한 권력이양은 이루지 못했다는 게 아쉬운 점입니다. 또한 외국인 배우자나 자녀를 둔 사람은 대통령에 출마할 수 없도록 막아 놓아 영국인 남편을 둔 수 치가 대통령이 될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관계마저도 2021년 2월 1일 군부가 다시 한번 쿠데타를 일으키어, 미얀마는 좌절 가운데 빠지게 됩니다. 이번 쿠데타의 계기는 작년 2020년 11월 8일에 치러진 총선에서 이번에도 NLD가 83.2%의 압승을 거두면서 군부가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였고 쿠데타의 가능성을 시사하더니 결국 2월 1일에 단행한 것입니다. 이에 국제사회는 우려를 표명하여 군부의 돈줄이 되는 경제 제재나 무기 수출 제한 조치 등 이루어지고 있으나, 이 또한 군부에서 미리 계산된 듯 날로 더 잔혹하게 시민들을 학살하고 있는 것이 현재 모습입니다.
그녀는 영국으로부터 식민지 지배 시절, 미얀마의 독립운동 지도자인 아웅산 장군의 딸입니다. 아웅산 장군은 1947년 1월 영국 총리 C. 애틀리와 아웅산 간에 '애틀리-아웅산' 협정을 맺음으로써 미얀마 독립을 위해 제1보를 내디딘 인물로서 국민들에게 추앙받는 '영웅'이자 '국부'인 셈이었죠. 하지만 그 해 8월에 암살을 당해 일찍이 세상을 떠났고 아웅산 수 치 또한 아버지를 어려서부터 잃게 됩니다.
그 이후 그녀는 델리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옥스퍼드인 세인트 휴스 칼리지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습니다. 영국 유학시절에 남편인 마이클 에어리스를 만나 아들 둘을 낳고 교수로 일하는 남편을 내조하며 가정 주부로 살았습니다. 85-86년엔 일본 교토대학 동남아시아 연구소에서 일하며 자신의 아버지인 아웅산 장군과 관련된 역사 연구를 진행하였죠.
그러다 1988년에 어머니 병간호로 본국으로 귀국한 뒤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8888 항쟁'에 참여하게 되면서, 일반 가정주부이자 연구원이었던 그녀의 삶이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로 갑작스레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영향 때문에 큰 지지를 받으며, 군부에게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며 야당 세력인 '국민민주연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를 창설하고 의장이 되었습니다.
수 치가 주도한 민주화 운동은 네 윈 장군을 권좌에서 물러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으나, 이는 결국 군사정권의 대량학살로 이어졌고 그녀는 1989년 처음으로 가택연금에 처해져 2010년까지 몇 번의 휴지기를 빼면 약 15년 동안 집에 갇혀 살았습니다. 1991년엔 그녀의 민주화 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되었고 다만, 연금상태에 있었기에 그의 가족들이 그녀를 대신하여 참석하였습니다.
2015년엔 총선에서 수 치가 이끄는 NLD가 압승을 거두면서 53년 만에 독재의 종식을 알리고 민주주의를 되찾았지만, 기존의 헌법과 군부의 잔재 그리고 여전히 막강한 그들의 권력까지 통제하기엔 역부족이었고 이런 긴장되는 대치 관계 속에서 틈만 나면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겠다고 협박을 하는 등 인권과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던 아웅산 수 치조차 군부에 의해 진행되었던 '로힝야족 대학살'에 대해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는 게, 현재 새롭게 밝혀진 견해입니다.
박정희의 암살이 있고 난 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을 필두로 한 하나회 조직의 신군부(12.12사태)는 집권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1980년 5월 17일 기습적으로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민주주의의 요구를 부정한 채 정권을 장악하는데 혈안이 되어 18일 전라도 광주로 계엄군을 보내 민주화 운동을 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진압하게 됩니다. 이에 광주 시민들은 분노하여 격렬하게 항거하였지만 신군부의 총과 칼의 무력 진압은 무고한 사람들까지 살인하게 되면서 10일간의 투쟁은 결국 비참하게 끝나게 되었습니다.
5·18 민주유공자 등록 현황(2018년 12월 31일 기준)에 따라 사망 행불자 181명, 부상자 2,762명, 기타 희생자 1,472 명이며 총 4,415명의 피해자를 발생시켰습니다. 그 이후에도 광주 시민들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는데, 바로 전두환의 5 공화국 정부가 5·18을 불순자들 또는 김대중이 북한에게 사주하여 발생한 사건으로 왜곡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언론을 통제하고 있던 신군부에 의해 '광주 소요사태', '광주사태'등으로 보도해 일반화시켰고 전두환이 집권(5 공화국)했던 1980~87년까지 약 8년 동안 진실은 가려지게 된 것이죠.
현재는 역사적으로 진실이 밝혀졌음에도, 선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5.18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망언을 일삼는 극우 세력도 아직 존재합니다. 그리고 가장 책임 있는 전두환은 잘못을 반성하거나 사죄하기는 커녕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오히려 역정을 내기도 합니다. 또한 일부는 그때 당시 광주 시민들이 무기고를 탈취하여 무력시위를 하였기 때문에,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고 폄훼를 하기도 합니다. 과연 훈련된 공수부대원들의 무차별 진압 앞에서, 내 가족과 이웃이 이유 없이 피를 흘리며 죽어 가고 있는데 가만히 앉아 있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지금의 미얀마 사태를 보더라도 그때 광주의 모습이 어땠을지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최근에 5.18 당시 군인이었던 분이 광주를 찾아가 자신의 죄를 이실직고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평생 마음의 짐으로 살았다고 하시는데, 서로 부둥켜 앉고 용서를 구하고 화해하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한때 시민들을 짓밟으며 신군부의 부역자로 살았던 그가 뒤늦게 반성한 걸 보면, 나쁜 짓도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나 봅니다. 진실은 언제나 드러나기 마련이고, 우리는 역사 앞에 마침내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현재의 야욕과 자신의 안위 때문에 평생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 잘 돌아보아야겠습니다.
미얀마에서는 세 손가락 시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세 손가락의 뜻은 '군부 독재 저항', '군부 반대', '복종하지 않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민중이 쓰는 사인인 것이죠. 이 세 손가락 시위는 2014년 태국 시위와 2019년 홍콩 민주화 시위에도 자주 등장한 대표적인 저항의 표현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미얀마 유학생들과 이주민들이 미얀마를 도와달라고 구호를 외쳐며 군부 독재에 저항하는 시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들의 행렬과 목소리 속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결기가 느껴지지 않으신가요?
저 또한 어떻게 현실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마침 저의 글 <엄마, 아프리카 잘 다녀올게!>를 연재 중인 국제개발협력 관련 커뮤니티인 '김치&칩스'에서 '국개협UP', '이어주네', '코빌' 단체와 함께 <국제개발협력 커뮤니티 얼라이언스>라는 연대체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연대체는 미얀마에서 현재 진행 중인 끔찍한 사태의 심각성에 공감하며, 국제개발협력 실무자이자 활동가로서 미얀마의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구체적 활동들을 해나간다고 합니다. 그의 첫걸음으로 현재 '연명 캠페인'이 진행되고 있는데, 저도 이번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아래 링크 걸어 놓았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부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정의롭고 평화롭게 공존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그 날을 꿈꾸며 미얀마에 곧 봄이 오길 소망합니다.
https://www.notion.so/130306495bb84a938c41c07b6ae7e3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