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은 큰 일들에나 적용할 것. 작은 일들에는 연민만으로도 충분하다."
마감기한이 임박한 자기소개서들을 꾸역꾸역 해치우다 문득 휴대폰 메모장에 적힌 '책읽고 글쓰기'가 눈에 들어왔다. '꽤 오래전부터 메모장 한 켠을 차지하고 있던 것 같은데...' 책을 읽지 않았던 때라고 시간을 마냥 속절없이 흘려보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야구동아리 감독을 맡으며 운동에 매진했고, 쌓여가는 과제와 시험에 파묻혔으며, 110m 허들 경주를 펼치듯 채용전형들을 뛰어넘기 바빴다. 꽤나 오랜만에 책을 집어든 것에 게으름만을 탓한다면 갖가지 일정들로 빼곡하게 차있는 캘린더 앱이 억울할 일이다.
생각해보면 그간 책을 읽고 기록하는 일을 게을리 한 것은 '나중'이라는 좋은 핑곗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승전만 끝나면, 기말고사만 끝나면, 채용만 확정되면. 미래를 담보잡아 빌려온 시간들은 그렇게 책 바깥에 있는 것들로 채워졌다. 그렇게 마음 한 켠에 쌓여온 빈곤함이 임계치에 달한 어느 날, 서점에 들러 책을 집어들었다.
"삶 전체와 그 삶을 구성하는 나날들의 관계는 말하자면 프랙털과도 같다고 할 수 있을거예요. 삶의 하루하루는 그 자체로 삶 전체를 함축하고 있다고 할까요. 그러니까 삶 전체의 목표를 위해서나 먼 훗날의 골인 지점을 향해서 오늘 하루를 희생하려는 것이 꼭 바람직한 태도인 것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늘이 비록 먼 여정 위의 작은 점 하나 같은 짧은 시간이라고 할지라도, 그 하루만의 행복과 보람은 반드시 필요해다고 할까요. 미래는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고, 목표라는 것은 변할 수도 있으며, 결국 하루하루가 없는 삶 전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p.135 '15년 후' 말콤 글래드웰 <블링크>)
풍요 속 빈곤. 책을 읽고 기록하는 기쁨을 희생하고 눈앞에 닥친 일상의 과제들에 천착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덕에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는 두꺼워졌지만 마음 한켠에 공허함과 빈곤함도 동시에 커졌다. 작은 나뭇가지가 나무 전체의 모습과 흡사한 것처럼, 하루하루 작은 점들이 모여 삶이라는 궤적을 만들어간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살았다. 읽고 쓰는 일의 즐거움은 '남는 시간'에 느낄만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내서라도' 느낄 가치가 있는 것임을 새삼 되새긴다.
"인간은 삶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습득하려고 한다. (중략) 그런데 왜 사랑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처럼 수월한 것은 없다거나 사랑은 자연발생적인 것이므로 따로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따위의 안이한 생각에 빠져있다. 사랑에 실패하는 사람은 많지만, 사랑에 대한 자신의 능력 부족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p.55 '사랑의 기술' 이승우 <생의 이면>)
"사랑이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관계이기 때문이죠. (중략) 사랑을 지켜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열정이 아니라 노력이고, 본능이 아니라 본능을 넘어선 태도입니다. 관계에 대한 모든 것은 배워야만 하고 갈고닦아야만 하지요. 그건 사랑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p.56 '사랑의 기술' 이승우 <생의 이면>)
읽고 쓰는 일 뿐만 아니라 사랑도 남는 시간에 할만한 것이 아닌, 시간을 내서라도 할만한 일이다. 안온한 환경에서 여러 조건을 갖춘 완벽한 대상을 만나면 진정한 사랑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은 사랑을 '관계'가 아닌 '성취'로 바라보는 시각에 기인한다. 에리히 프롬의 비유처럼, 완벽한 사과를 찾아낸 후에야 훌륭한 작품을 그리겠다는 미술가는 사랑의 본질을 '그림그리기'가 아닌 '명품사과 찾기'로 오인한다. 사랑의 기술을 익히지 못한 사람에게 종이에 연필을 수없이 마찰시키며 나와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보기좋게 무시당한다.
화백이 몇 점의 작품을 세간에 내놓기 위해 억겁의 시간동안 크로키를 훈련하는 것처럼, 인간의 사랑도 결실있는 관계를 만들기 위해 끝없이 갈고 닦아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일상이 되어 생각을 나누고 감정을 표현하며 자신의 우주와 상대의 우주를 조화시킬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랑의 기술을 조금이나마 '습득'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차갑고 기계적으로 보이는 논리에서조차 모든 문제들이 참과 거짓의 두 가지 대립항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면적으로 부정하거나 전체를 통틀어 긍정하지 않고도 더 나은 방식을 도출하는 것이 가능할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알베르 카뮈는 이렇게 말을 했던 것이겠지요. '원칙은 큰 일들에나 적용할 것. 작은 일들에는 연민만으로도 충분하다.'"(p.78 '원칙의 함정' 줄리언 바지니<가짜 논리>)
"최근 논란이 되는 '000'에 대해, 찬성 혹은 반대 중 하나의 입장을 택해 논평하시오." 기자라는 직업을 준비하는 취준생들은 수없이 찬성과 반대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살이는 예비 언론인들이 쓰는 원고지처럼 빈틈없이 치밀하지 않다. 찬성과 반대만으로 세상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거니와 역사를 바꾸는 일은 오히려 찬성과 반대 사이 수많은 스펙트럼 사이에서 벌어졌다. 자유와 평등, 효율과 공정, 이념과 실용 사이에서 매번 줄다리기를 반복하며 결론을 도출해왔던 우리 민주주의 시스템이 그 방증이다.
복잡다단한 이해관계와 가치관이 뒤엉킨 현실에서 내 논거가 다른 어떤 것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해야 하는 순간이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때마다 알베르 카뮈의 말은 더없이 소중하다. '원칙은 큰 일들에나 적용할 것. 작은 일들에는 연민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