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없는 터널이 발견됐다는 소식은 아직 들려오지 않았으니까
비극은 늘 예기치 못한 시공간에 우리를 찾아온다. 2020년 겨울 불현듯 찾아온 전염병이 2년넘게 우리를 괴롭힐 것을 그땐 미처 알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책 속 비극도 어느날 갑자기 한 남자에게 다가온다. 차를 몰고 신호를 기다리던 남자는 예고없이 찾아온 비극 앞에 “눈이 안 보여”라는 말을 되뇌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우리를 괴롭혔던 나쁜 바이러스처럼, 그 비극 또한 사람과 사람을 통해 더 넓게 퍼져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 전체를 잠식했다. 코로나19는 우리의 호흡기를 괴롭혔지만, 이 이름모를 역병은 눈앞을 희게 물들여 시력을 앗아간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었다.
무엇인가 본다는 것은 권력을 가진 자의 행동이다. 구태여 미셸 푸코의 파놉티콘(Panopticon)을 설명하는데 지면을 할애하지 않아도, 부동산 시장에서 펜트하우스가 왜 그리 비싸게 매매되는지 생각해보면 쉽게 납득할 수 있다.[1] 더 높은 곳에 올라갈수록, 타인에게 보이지 않는 동시에 더 많은 타인을 바라볼 수 있는 구조는 현대사회에선 자본권력을 가진 자의 전유물이다. 결국,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것은 바라봄의 권력을 상실함과 동시에 자아가 사고하고 재단할 대상이 부재하다는 뜻이다. 시야에 들어온 대상을 인지하고 해석하여 자신만의 세계를 만드는 일련의 ‘판단’ 과정이 그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히는 것이다. 작품에서 눈을 잃은 자들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눈이 먼 남자, 검은 색안경을 쓴 여자, 의사, 노인으로 표현된 이들은 그저 바라봄의 권력을 상실한 여러 사람들 중 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 무엇도 볼 수 없는 사회에서 그들이 상실한 것은 권력만이 아니었다. 이들이 보여준 인간성의 상실은 읽는 이로 하여금 인간다움의 근원이 진정 이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맞는지 자문하게 한다. 눈먼 자들이 갇힌 수용소에서 윤리와 도덕은 오간데 없어지고 식량을 대가로 여자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일말의 죄책감을 갖는 이는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오감 중 하나만을 잃었을 뿐인데 인간다움과 윤리는 모래 위의 성처럼 무너져내렸다. 우리의 이성과 윤리가 감각적 충족이라는 불안정한 지반 위에 서있는 것임을 아는 일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하지만, 인간 윤리와 도덕의 완전무결성을 맹신하는 것보단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그 불완전성을 토대로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편이 더 바람직하리라는 생각에 이유모를 안도감 또한 느껴진다.
앞이 보이지 않는 사회의 종국은 시각 권력과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이중의 상실이었다. 그러나 이 결론 앞에 우리가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아도 될 이유는, 대개의 고난이 그렇듯 결국에는 그 끝이 있다는 사실은 변치 않기 때문이다. 의도치 않은 비극은 때론 터널과 같아 어디쯤 서 있는지 얼마나 더 힘들어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저 희미하게 보이는 작은 탈출구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길과 같다. 우리가 겪고 있는 바이러스와의 재겨운 전쟁도 이제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터널의 끝은 그리 극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작중에서 시력을 잃은 인물들이 모두 같은 시간과 장소에서 극적인 효과로 눈을 뜨게 된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저 시력을 잃은 순서대로 다시 시력이 돌아온 것뿐이었다. 극적인 모멘텀보다 정적인 연속성이 더 많은 것을 바꾸며 터널을 지나는 인간 삶의 서사가 드라마가 아닌 다큐멘터리에 가깝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린 어떤 터널도 함께 이겨낼 용기를 얻게 된다. 매일같이 믿을 수 없는 뉴스들이 세간에 쏟아지지만, 끝이 없는 터널이 발견됐다는 소식은 아직 들려오지 않았으니까.
[1]유현준, 2015,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 이 글은 고려대학교 독서토론동아리 '호박회'의 문집(호박문집)에 발행된 글 중 일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