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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MIN Apr 24. 2020

보도블록 위의 '터키쉬 앙고라'

들꽃 같은 작은 생명들을 그리며



  새끼를 낳았을 수도 있겠거니 생각은 했지만 정말 새끼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착잡해졌다. 아주 어리지도 않은, 벌써 몇 개월은 되어 체구 작은 어미묘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 새끼들이었다. 어미로 추정되는 고양이는 등에 상처를 입고 아직 차가운 봄바람에 웅크려서 다가오는 새끼들을 물리고 있었다.


수많은 아이들과 산책 나온 강아지들이 오가는 길목에서 눈비 막을 천장도 없고 바람 막을 벽도 없이, 있는 것이라고는 듬성듬성 나 있는 풀 몇 포기뿐. 눈처럼 하얀 고양이들은 너무나도 눈에 잘 들어왔다. 그 어떤 자연물에 숨는다 한들 숨겨지지 않는 인간에 의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하얀색이었다.





오가는 아이들이나 사람들은 고양이가 드물게 여러 마리 있는 것이 신기해서 성큼 다가갈 뿐이었겠지만 그들에게 몇 분마다 큰 소리를 내며 저벅저벅 다가오는 인간들은 공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강아지가 이끄는 대로 풀숲 너머 그 얼마 되지도 않는 안식처까지 침범하는 견주들에게는 자기 강아지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고 용맹함을 뽐낼 기회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숱하게 쫓기고 상처까지 입어본 고양이에게는 생사를 오가는 순간이 되었을 것이다.


두 마리 고양이를 키우는 내게는 지금 이 둘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항상 못 해준 것만 떠올라 미안했고, 조금이라도 더 많이 놀아주고 싶고 조금이라도 더 좋은 음식을 주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하루 중 첫째와 보내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둘째가 어김없이 관심을 갈구해왔다. 나의 하루는 이 둘에게 사랑을 쏟는 것만으로도 부족했다. 그런 나에게는 저 식구들을 시간적, 공간적, 경제적으로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길에서는 접하기 힘들 따뜻한 물을 보온병에 담아 가서 말린 생선 트릿을 섞어 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이것밖에 없다는 게 서러웠다.




  나도 고양이를 반려하기 전에는 인터넷에 도는 사진을 보며 마음에 드는 품종과 모양새를 정해보곤 했었다. 하얀 고양이가 예쁘니까 터키쉬 앙고라가 좋겠다. 털이 빠지는 건 싫으니까 단모종으로. 내 고양이는 특별했으면 하니까 이왕이면 오드아이가 좋을 것 같아. 이후 어미 잃고 울고 있던 스트릿 출신 첫째를 들이고는 고양이에 대해 더 잘 알아가며 내가 보던 것이 단순히 ‘외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생김새만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 없듯 고양이도 털 색상에 상관없이 저마다의 성격과 취향이 있었고, 어떤 모양새를 하고있든 하나같이 사랑스러웠다.


아마 하얀 고양이 두 마리를 보란 듯이 유기한 사람도 과거의 나와 같은 안일한 마음으로 물건 고르듯이 고양이를 골랐을 것이다. 어리고 제일 귀여울 시기에 사진 몇 장 찍으며 용품 몇 가지를 사들이다가 점점 몸집이 커지고,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 설쳐대며 사고를 치며, 게다가 발정기 증상까지 보이니 두 마리 한 번에 중성화시킬 여력은 없겠다 싶어 버린 것일까. 사람 많이 다니는 산책로에 ‘마음 약한 누군가가 보고 주워가겠지, 그렇지 않더라도 요즘 캣맘이 많다니까 누군가는 밥을 주겠지, 둘이니까 서로 의지하며 괜찮겠지, 어차피 고양이는 사냥도 잘한다니까’ 이런 생각을 하며 유기한 것일까.


세상 어딘가에 있을 당신이 버린 고양이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똑바로 봤으면 좋겠다. 벌써 저 근처에서 보인 지 6개월이나 되었다는 저들은 중성화가 되지 못해서 검은색, 노란색, 흰색 새끼를 낳았고 춥지 않아 다행이었다는 작년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맞아가며 버텼다. 봄철이 되어서도 아직 찬기가 가시지 않은 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저 황량한 풀숲에서 몸도 제대로 숨기지 못한 채 지나다니는 행인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 새끼들이 늘어난 상황에서 밥 주는 사람들의 동정심에 기대어도 주린 배를 다 채우지 못해서 쌓여있는 플라스틱 통을 뒤적거리곤 한다. 개에게 물린 등의 상처가 아프고 쉬고 싶어도 지나가는 산책 나온 개들이 많아서 잠시도 숨 돌릴 틈 없이 긴장하고 있어야 하고 언제든 뛰어서 도망갈 수 있어야 한다.


화가 난다. 물건 사듯이 데려왔다가 유기한 사람에게, 자기 개를 컨트롤하지 못해서 힘든  생활에 상처까지 만든 견주에게, 인형 대하듯 만져보겠다며 무턱대고 소리 지르며 뛰어가는 어린애들에게, 고양이를 위한 공간 하나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삭막한 인간 사회에.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저들이 눈에 밟히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력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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