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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MIN May 10. 2020

길냥이에게 '밥'을 준다는 것

끼니를 중시하는 한국 문화의 반영



  집에 사료가 떨어졌다. 아라와 노리의 주식을 사료에서 생선 통조림(주식 캔)으로 바꾸는 과정이라서 남은 사료를 살피지 않고 방심한 탓이다. 다행히도 캔은 잔뜩 쌓여 있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사료에 익숙해진 아라와 노리는 아직 뭔가를 덜 먹은 기분이 드는 모양인지 오늘 먹을 분량을 어지간히 먹고도 계속 밥그릇 근처를 서성거렸다. 사람으로 치면 쌀밥을 안 먹고 밀가루만 먹은 날 괜히 허기지는 기분이랑 비슷한 걸까.


  어제저녁에 급하게 주문한 사료는 주말이 끼어 있어서 아직 배송 출발도 하지 않았고 엄마는 날 더러 고양이에게 밥을 주지 않는 나쁜 보호자라며 구박했다. 세상에, 내가 우리 애들을 굶긴다니! 오늘 신선한 생선 살코기에 유산균과 따뜻한 물을 섞어서 벌써 몇 끼나 먹였는데! 내심 억울했지만 당장 급한 대로 근처 마트에서 사료를 사기로 했다. 마트에는 평소에 구매하는 사료가 없어서 주로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편인데 주문한 사료가 올 때까지 아라와 노리가 캔만 먹어줄지 확신이 없었다. 우리 애들은 언제쯤 ‘주식’ 캔을 주식으로 먹어줄까. 진작 캔으로 전환하지 않은 내 잘못이 컸다.



Image by Pexels from Pixabay.



  저녁을 먹고 어둑해질 무렵 집을 나섰더니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들고 나오긴 했지만 정작 쓰자니 민망할 정도로 흩날리는 비였다. 마트 근처에는 전에 봤던 하얀 유기묘가 주로 출몰하는 곳이 있었다. 마침 배도 부르고 걷고 싶은 기분이라서 조금 돌아가더라도 잘 지내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했다. 고양이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마트 가는 길을 둘러 간 셈 치면 될 일이었다.


  보통 여섯 시 가량에 밥을 먹으러 오던 고양이가 오늘은 어쩐 일인지 늦은 시간에도 급식소 주변 풀숲에 오도카니 앉아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본디 사막 출신이라는 고양이들이 그렇게나 질색하는 물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 털이 축축할 텐데도 비와 바람을 맞으면서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애기야, 왜 여기 있어?”하고 말을 걸었더니 “애애옹!”하며 가까이 오려는 시늉을 하다가 흠칫하고 다시 물러났다. 동네 사람들의 인심이 좋아서 그런지 사람을 적대하지는 않아도 아직 경계심은 풀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쁜 사람들에게 해코지를 당하느니 저 정도 거리를 유지하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병원에서 살을 빼야 한다는 판정을 받은 노리나 근육질에 몸집 큰 아라에 비하면 하얀 고양이는 작고 가냘파 보였다. 아직 어려서 그런 걸까. 아마 아라가 사냥놀이하면서 신나게 우다다 망아지처럼 뛰어가면 거기에 치여서 몸도 못 추릴 정도로 조그마했다. 여름이라기엔 쌀쌀한 바람과 흩날리는 비를 다 맞고 있는 고양이가 가여워서 쪼그리고 앉아서 한참을 마주 보다가 본 목적을 상기시키고 어쩔 수 없이 마트로 향했다.


  마트에서 깨알 같이 적힌 성분표를 한참을 읽어보고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개중에 그럭저럭 나아 보이는 사료를 사서 다시 고양이가 있는 곳으로 향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급식소 밥그릇을 살펴보니 사료가 채워져 있었다. “왜 이건 안 먹었어?”하면서도 손에 들린 사료를 부어줬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가서 먹었다. 이 시간 즈음에 자주 찾아주는 사람이라도 있는 건지 아니면 누가 되든 와서 뭐라도 주면 되는 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고양이는 아마 제 가족들이 있을 어두컴컴한 곳으로 떠나갔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 사료를 부어줬더니 자고 있던 아라와 노리가 눈을 번쩍 뜨고 달려와서 그릇을 깔끔하게 비워냈다. 엄마한테 오는 길에 본 고양이 얘기를 하고는 "엄마 친구 고양이 키울 생각 없대?" 물어봤지만 기대하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된 길생활에서 배 곯지 않고 조금이라도 힘을 낼 수 있도록 끼니를 챙겨주는 것, 딱 이 정도였다.






  가끔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캣맘, 캣 대디 문화가 ‘끼니’를 중시하는 한국 문화가 반영된 현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먹거리가 부족해 끼니를 잘 챙기지 못하던 역사의 잔재가 지금까지 이어져서 ‘밥은 먹었어?’나 ‘나중에 밥 한번 먹자!’와 같은 표현이 인사말이 되고, 굶주린 사람만큼 가엽고 불쌍한 게 없으며 누군가를 굶게 하는 자의 죄질을 극악무도한 것으로 보는 우리의 관념 문화 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살아가는 데에  필요하다는 의식주  (고양이에게는 근사한 털코트가 있으니 ‘ 별개로 치더라도) 비바람을 피하고 안락하게 살아갈  있을 공간이 아니라 끼니를 우선적으로 챙겨준다는 발상이 지극히 한국다웠다. 그리고  나아가서 모든 사람이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느라 힘겹더라도 열악한 인간 세상의 틈바구니에서  곳을 잃어가는 길고양이들의 끼니를 챙겨주는 캣맘,  대디 문화에 '정'과 '인심'이란 것이 살아  쉬고 있음을 느낀다.



Image by Natasha G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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