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란 허허실실 웃고 다니면 안 된다고 했다.
"좀 시니컬해야 해." "그렇게 밝아선 안 돼."
어디선가,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다.
그런 말들은 곧잘 ‘기자다움’이란 이름으로 포장됐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이야말로 낡고 폭력적인 시선이라고 생각했다. 웃는 얼굴을 가볍다 여기고, 무표정한 얼굴을 진중하다 착각하는 사람들. 그들은 늘 세상을 삐딱하게 보아야만 언론의 본령에 닿을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그런 신념 아래에서 착한 동료들을 눌러보려는 몇몇 기자들을 많이 봐왔다. 그럴수록 생각했다.
기자 일에 어떻게 한 면만 있겠는가.
유쾌한 기자, 매사에 비판적인 기자, 성격 좋은 기자, 성격이 까다로운 기자.
각기 다른 시선이 교차하고 충돌하면서 기사는 탄생한다.
다양한 관점이 있어야 다양한 사실이 드러난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민주주의다.
누군가는 말한다.
“밝게 웃는 너는 기자답지 않다.”
그 말은, 나를 슬프게 했다. 그리고 분노하게 했다.
나는 누구보다 예민하게 세상을 감지했고, 누구보다 오래 들여다보았다.
웃는다고, 감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웃는다고, 고통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이따금 문득 생각나는 기자가 있다.
내 앞에서는 무심했던, 하지만 늘 의외의 시점에서 예리한 질문을 던지던 사람.
그 사람의 기사를 보면, 특유의 침착함과 집중력, 그리고 언뜻 스쳐 지나가는 따뜻함이 있었다.
유쾌한 표정을 짓는 나를 비웃던 사람들의 얼굴보다,
나는 그 기자의 문장을 더 오래 기억할 것이다.
기자는 그저 비판하는 직업이 아니다.
기자는, 애정을 품은 채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나 역시도 때때로 분노했다. 화가 났고, 소리 지르고 싶었고, 정면으로 부딪치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내 손은 자판 위에서 멈췄다.
‘이 사람이 왜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어떤 구조가 이러한 범죄를 가능케 했을까.’
비판은 그렇게 시작됐다. 증오나 시니컬함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애정에서.
‘이건 틀렸으니까 고쳐야 해’라는 신념에서가 아니라,
‘이건 우리가 더 나아질 수 있으니까 다시 보자’는 마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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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나는 종종 듣는다.
“기자는 시니컬해야지.”
“너무 밝으면 기자로 오래 못 가.”
그 말들, 이제는 웃으며 넘긴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시니컬하지 않아도 기자는 기자다.
웃는다고, 기자가 아니란 법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