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하고도 뉴욕, 그중에서도 맨해튼이라는 세계 최고의 멜팅팟(Melting pot)에서 '한 달 살기'를 해보기로 했다. 성격이 급하고 욕심이 많은 내가 '물 건너간 김에 다 훑고 오던' 기존의 여행 스타일에서 벗어나 한 곳에 머무는 경험을 택하다니, 드디어 내게도 여유라는 내공이 생긴 것일까. 아주 오랜만에 떠나는 장기(?) 여행에 마냥 설렐 수 없는 건 불혹을 넘긴 나이 때문이기도 하지만, 세 번째로 커리어를 전환하는 중대한 시점에서 매사에 신중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번 여행은 산업 시찰에다가 어학연수까지 덤으로 기대해보는 일종의 프로젝트인 것이다.
하지만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한 대가로 떠나기 전부터 몸살이 났다. 세계의 모든 인류와 문명이 집적된 맨해튼에서 숙소를 구하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한 달이나 있을 건데 방을 보지도 않고 에어비앤비 같은 데서 덜컥 예약할 순 없었다. 미주 한인 사이트 중 가장 정보가 많다는 헤이코리안의 부동산 코너도 대부분 장기 거주를 원해서 쉽사리 성사되진 않았다. 맨해튼의 비싼 물가에 주저하며 주변 지역까지 물색해봤지만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숙소가 정해지지 않았으니 어학원도 알아보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결국 흐지부지되었다.
그러다 미국으로 떠나는 날, 비행기가 뜨기 십여 분 전에 기적처럼 헤이코리안에서 연락이 왔다. 내일 뉴욕에 도착하면 방을 보러 오라는 것이다. 하나는 타임스퀘어 인근의 1000짜리 방이고, 다른 하나는 로어맨해튼의 1600짜리 스튜디오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냥 '방'과 '스튜디오'의 차이를 몰랐다.) 한꺼번에 선택지가 2개나 생겼으니 비행기에서 편히 쉴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옆자리에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중국인이 앉는 바람에 팔자에도 없는 통역을 해주느라 진땀을 뺐다. 그러면서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중국어에 한숨이 나왔고, 미국 가서 영어 쓸 일이 새삼 걱정됐다. 숙소 고민 해결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번엔 외국어 고민이냐. 참으로 여행은 설렘과 걱정의 연속이란 생각이 든다.
뉴욕에서 방을 보러 가는 과정 또한 순탄치는 않았다. 어쩌면 미국에 도착한 첫날부터 시장경제의 일면을 경험한 건지도 모르겠다. 타임스퀘어 인근의 방은 말 그대로 맨해튼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었고, 천 달러라는 경이로운 가격 때문에나 말고도 경쟁자가 또 있었다. 하필 그분이 장기로 투숙할 유학생이었기 때문에, 고작 한 달짜리인 나는 면전에서 튕겨야 했다. 그날따라 비는 왜 그리도 세차게 퍼부어대던지... 이런 날씨에 굳이 '희망 고문' 하게 만든 집주인이 야속했지만, 시장경제에선 사유 재산의 주체자가 경제 의사 결정권을 갖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생각해보면 얄짤없는 미국의 자본주의 마인드를 첫날부터 알게 해 준 집주인에게 오히려 고마워할 일이었다.
결국 내 보금자리는 로어맨해튼의 1600달러짜리 스튜디오가 당첨되었다. 위치는 미드타운에서 꽤 떨어져 있지만 세탁기를 제외한 풀옵션으로, 무엇보다 '오롯이 나만의 공간'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니까 '스튜디오'란 오피스텔처럼 풀옵션의 단독 공간을 말하고, 타임스퀘어 인근의 '방'은 말 그대로 방만 혼자 쓰고 욕실과 부엌을 셰어하는 일종의 셰어하우스였던 것이다.) 아마 비용을 좀 더 들여서라도 더 나은 환경에서 지내라고 어제 일이 어긋난 게 아닐까 싶다.
한 달 살기는 숙소가 7할이다. 그다음 일은 주위 환경을 통해서 하나씩 하나씩 자연스럽게 다가오고 있었으니. 바로 옆집에 사는 스튜디오 주인의 9살짜리 아들은 가끔 내게 동네 맛집을 소개해주었으며, 습관적으로 잘못 알고 있던 영어 발음도 교정해주었다. 홍대에서 미술을 전공한 집주인은 로어이스트의 홍대 같은 밤 문화로 나를 인도했으며, 이민자로서의 삶에 대한 애환을 들려주기도 했다. 물론 나보다 한참 어른이셔서 빨리 결혼하라든가, 내 집 장만을 하라는 구식 조언도 잊지 않으셨지만.
이미지 출처: Snowcat in New York
오고 나서 보니 숙소 주변의 환경은 더없이 매력적이었다. 바로 옆에 차이나타운이 있어서 저렴한 맛집도 많고 상권도 좋았다. 막상 중국을 여행할 땐 몰랐는데, 차이나타운은 돈이 오가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활기찬 곳이었다. 차이나타운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월스트리트가 있는 금융 지구가 있으며, 동쪽으로는 브루클린으로 넘어가는 3개의 다리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소호, 그리니치, 첼시 지역이 일직선으로 이어지며, 여기서 하이라인을 따라 산책하다 보면 어느새 공공도서관에 이른다. 도서관에서 센트럴 파크까지는 명품 거리인 5번가를 따라 걸으면 금방이다.
뉴욕은 맨해튼 안에 거의 모든 시설이 집중되어 있고, 블록마다 즐길 거리가 무궁무진하여 걷는 재미가 쏠쏠했다. 게다가 무려 평지라는 사실! 나중에 언덕 투성이인 LA, 샌프란시스코, 시애틀을 가보고 나서야 맨해튼이 도보 여행의 천국이었다는 것을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그러니 맨해튼에서는 시간적인 여유가 허락된다면 충분히 걸으며 느껴보시길 바란다. 뭔가 일부러 하려고 하지 않아도 블록마다 골목마다 인사이트는 무궁무진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