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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veLife Jul 12. 2020

타임스퀘어와 광장 문화

아메리카 기행 - 뉴욕 2

20세기 말, 태어나서 처음 해외로 나가본 곳이 유럽이었다. 그때 참 인상적이었던 건 어느 도시든 광장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길을 물어보면 늘 기준점은 광장에서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사람이 모여드는 곳에 자연히 상권과 교통이 발달하고, 상권이 커질수록 그 광장은 더욱 의미 있는 장소가 된다. 사람들은 그곳에 각자의 유명 인사나 랜드마크가 되는 구조물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그래서 그 도시의 광장에 가면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트렌드를 짐작해볼 수 있다. 과연 유럽의 새로운 역사가 쓰인 미국도 그럴 것인가? 의문을 품으며 뉴욕의 심장, 타임스퀘어(Times Square)로 나가보았다.

매체에서 자주 접하긴 했지만, 그래도 광장은 이럴 것이란 기존의 공식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무리 번화한 도심 속이라도 넓은 잔디밭이 있고, 벤치에서는 사람들이 여유롭게 담소를 나누며, 실한 비둘기들이 그 사이로 돌아다니는 흔한 모습을 상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타임스퀘어는 그런 나의 상식을 완벽하게 무너뜨렸다. 균일한 시멘트 바닥 위로 우뚝 솟은 마천루 외벽에는 현란한 광고판으로 넘쳐났다. 쉴 새 없이 바뀌는 광고판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속도가 타임스퀘어의 변화 속도를 말해주는 듯했다. 여기서 그대로 머물고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또 하나 특이한 건 '스퀘어'라는 명칭에 어울리지 않게 삼각형의 구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도로 체계는 좌우로 뻗은 Street와 위아래로 뻗은 Avenue로 이루어지는데, 맨해튼에는 특이하게 대각선으로 뻗은 도로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브로드웨이(Broadway)이다. 타임스퀘어는 42번가와 7번가, 그리고 브로드웨이가 만나는 삼각지대로, 미국의 대표 신문사인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의 본사가 있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단순히 랜드마크 건물에서 따온 그 이름이 이곳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시간'의 흐름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타임스퀘어의 한쪽에는 건물 전체가 유리로 된 커다란 맥도날드 건물이 있다. 비록 맥모닝이라는 메뉴는 식상하지만, 타임스퀘어를 가장 잘 내려다볼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미국 와서 첫 끼니를 맥도날드에서 하기로 했다. 한국에서도 먹어본 익숙한 맛의 맥머핀과 보통 맛의 아메리카노를 음미하며 이른 아침의 뉴욕 심장부를 천천히 관찰해본다. 쉴새없이 움직이는 광고판 아래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내가 대한민국의 소도시에서 편협한 시각에 빠져있을 동안, 세계의 인류가 모인 이곳에서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었구나.


옹기종기 모인 빌딩의 광고판으로 다시 시선을 옮겨본다. 말로만 듣던 삼성의 광고는 계속 나오는 게 아니라 다른 기업의 광고와 섞여서 무한 루프를 돌고 있었다. 이 모든 광고판들이 현재의 트렌드와 다가올 미래를 알려주는 듯했다. 특히 광장의 상징과도 같은 원타임스퀘어(One Times Square)에 노출되는 광고는 그 기업의 세계적인 영향력을 말해준다. 얼마 전 한 지인으로부터 삼성 광고가 걸린 자리의 1년 치 광고비가 20억에 달한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벽면 전체도 아니고 겨우 몇 층에 해당하는 구간인데 그렇게 어마어마한 금액이라니, 다시 한번 뉴욕의 클라스를 실감했다. 역시 있는 자들이 생존한다는 미국의 심장다웠다.


또 한 가지 인사이트를 얻은 게 있다면, 자연경관이나 역사적인 유물이 아닌 광고 하나만으로 도시의 조경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시에서 예산을 투입한 게 아니라 기업에서 자발적으로 홍보비를 투자해서 광고를 내고, 그 상징성 때문에 사람들이 자연스레 모여들면서 타임스퀘어만의 독특한 광장 문화를 창조한 셈이다.

서울의 광화문 광장과 뉴욕의 타임스퀘어 (사진 출처: 두산백과)

문득 대한민국 서울의 광화문 광장이 떠오른다. 경복궁의 광화문에서 청계천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도로에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이 지키고 있으며, 저 멀리 북악산의 위용이 어우러진 풍경만으로도 뉴욕의 타임스퀘어보다 훨씬 더 멋지고 고풍스러운데, 어째서 나는 외국의 이곳에서 에너지를 얻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타임스퀘어의 인공적인 건물과 광고판이 훨씬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일까? 바로 인기(人氣)의 차이이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기운이 활성화되는데, 광화문 광장은 어딘가 모르게 권위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여기도 한때는 민주화 운동이나 시위, 월드컵 응원전 등 인파로 넘쳐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단발성 참여 말고 지속적인 참여를 끌어낼 수 있는 콘텐츠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제는 우리도 광장에서 '시위 문화'가 아닌 '즐기는 문화'를 만들어내야 하지 않을까.


타임스퀘어의 광고판이 하나둘씩 모여 만들어낸 독특한 문화 현상은 꽉 막혀있던 내게 새로운 시야를 던져주었다. 문학이나 예술 분야만이 문화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행위가 문화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종문화회관의 공연이나 전시를 보러 가는 것도 문화이고, 그 뒤에 있는 빌딩에서 일하는 것도 문화가 될 수 있다. 유튜브에서 마음에 드는 영상을 찾는 것도, 브런치에 글을 쓰는 행위도 문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과연 오늘 나는 어떤 생활을 했고 어떤 문화를 만들어냈는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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