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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veLife Jul 14. 2020

센트럴 파크에서 뉴요커처럼

아메리카 기행 - 뉴욕 3

지금 여기에 공원을 만들지 않으면
100년 후에는 이만한 정신병원이 필요할 것이다.


현대 도시공원의 선구자 프레드릭 로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d)가 19세기 중엽 센트럴 파크가 있던 자리를 두고 한 말이다. 그 당시 이민자들이 몰려들면서 뉴욕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고, 맨해튼의 중심부(현재 센트럴 파크가 위치한 곳)에는 크고 작은 농장과 판잣집이 들어서면서 점점 무질서하고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변해갔다. 이에 뉴욕시에서는 도시를 재정비하고 녹지 공간을 조성하기 위한 설계 공모전을 개최하게 되었는데, 이때 우승작으로 선정된 작품이 바로 프레드릭 로 옴스테드와 칼베르 보(Calvert Vaux)의 'Greensward plan'이었다.

옴스테드와 칼베르 (사진 출처: Turnstile Tours)

칼베르와 옴스테드는 공원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 여성과 남성,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여가를 즐길 수 있는 민주적인 공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들의 이념 하에 1856년, 드디어 843 에이커(약 100만 평)의 거대한 공원이 조성되기 시작했고, 십수 년에 걸친 보수 공사와 자원봉사자들의 참여로 오늘날의 센트럴 파크가 탄생되었다.

사진 출처: news.virginia.edu

이렇게 봐서 가늠이 안 되겠지만 좌우로 3블록, 위아래로는 무려 51블록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넓이의 땅 안에 순수 공원만 조성되어 있는 것이다. 인구밀도가 높은 대도심에 이만한 규모의 그린벨트를 할당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1858년 완공 이래 160년 넘게 이 공간을 지켜왔다는 것이 참으로 대단하다. 그렇다고 이 공간을 그냥 놀리고 있냐면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이 도시는 그들의 공원을 마음껏 활용하고 있었다.


공원의 아래쪽에는 호텔존이 형성되어 있어 도심 속의 공원 뷰를 자랑하는 객실로 고객들을 유혹한다. 영화 <나 홀로 집에 2>에 나왔던 플라자 호텔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공원의 오른쪽 경계인 5번가는 명품샵이 몰려 있는 쇼핑거리지만, 공원이 시작되는 지점부터는 주택가와 박물관 단지를 조성하여 철저하게 문화 공간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즉 센트럴 파크는 이곳 주민들은 물론이고 박물관을 찾아온 사람들, 공원을 즐기러 온 사람들까지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운동장과 산책로와 피크닉 장소를 제공해준다.


참고로 공원 오른쪽의 어퍼 이스트사이드는 뉴욕에서 땅값이 가장 높은 곳으로 흔히 말하는 금수저들이 사는 부촌이고, 왼쪽의 어퍼 웨스트사이드는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신흥 부촌을 이룬 곳이다. 전설적인 그룹 비틀즈의 멤버였던 존 레논이 죽기 전에 살았던 다코타(Dakota) 아파트도 어퍼 웨스트사이드에 있다.

공원 안은 생각보다 울창했다. 산책로는 일정하지 않으며 오르막과 내리막이 뒤엉켜 있어 까딱하면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공원 문화가 익숙하지 않은 내게는 거부감부터 든 게 사실이다. 첫날부터 욕심내서 공원 끝까지 갔다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하필 마주한 풍경이 할렘의 어두운 표정이었다. 그 후로 무슨 공원이 그리도 쓸 데 없이 크냐며 한동안 센트럴 파크를 찾지 않았다.


하지만 맨해튼의 빌딩 숲과 소음 사이를 거닐다 보니 가끔 교외(?)가 그리워졌다. 그럴 때마다 브라이언트 파크나 워싱턴 스퀘어 파크 같은 적당한 크기의 공원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용기를 내어 다시 센트럴 파크로 가보고 깜짝 놀랐다. 그 안에 또 다른 맨해튼이 있었던 것이다. 빽빽한 블록 사이로 바쁘게 걸어 다니는 맨해튼이 아니라 목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소박한 도시락을 싸와서 여유를 즐기는 맨해튼의 모습이. 어떤 할머니는 집에서 직접 찻잔을 들고 와서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도 인간적이어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흘러나왔다. 이 안에서 뭔가 억지로 찾으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느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센트럴 파크의 존재 가치였다.


그후 나는 가끔 에어컨이 빵빵한 매장을 벗어나 샌드위치와 커피를 들고 센트럴 파크의 벤치로 피신해 있기도 하고, 달랑 책 한 권만 챙겨서 산책을 가기도 했다. 또 어떤 날은 이어폰을 꽂은 채 하염없이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센트럴 파크를 뉴요커처럼 즐기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센트럴 파크를 나와 5번가로 들어서는 순간, 다시 삐까뻔쩍한 맨해튼이 펼쳐진다. 마냥 이런 모습만 있었더라도 사람들은 지금처럼 뉴욕으로 몰려들었을까? 다시 한번 뒤돌아서서 센트럴 파크를 바라본다. 이 모호한 경계에서 '도심에서 자연으로 최단시간 탈출'이라는 칼베르와 옴스테드의 공원 철학을 한 번 더 되새겨본다. 인공적이지만 인간적인 센트럴 파크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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