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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veLife Jul 19. 2020

뉴욕의 잠 못 이루는 밤

아메리카 기행 - 뉴욕 5

지금 운명적인 사랑을 하고 있나요?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은 아마도 멕 라이언이 제일 예쁘게 나온 영화가 아니었을까. 영화 속의 캐릭터는 비록 4차원이긴 하나, <러브 어페어> 같은 진부한 사랑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Empire State Building)을 동경하며 운명적인 사랑을 꿈꾼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영화의 후반부에 나왔던 하트로 물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기억할 것이다. 비인간적인 대도시가 한순간에 인간적인 장소로 변하는 기적, 이 맛에 할리우드 영화를 찾아보게 되는 것 같다.

그런 이유로 전망은 무조건 여기서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뉴욕에는 여기 말고도 더 높고 멋진 전망대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할리우드가 만들어낸 로맨틱한 신화는 나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으로 이끌었다. 그러고 보면 뉴욕만큼 스토리텔링이 잘 된 도시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하필 내가 갔을 때 방학 시즌과 겹쳐서 초성수기를 이루고 있었고, 빌딩에는 늘 방문객들로 넘쳐났다. 그래,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멕 라이언과 톰 행크스가 오붓하게 만나 '러브 어페어'를 시작했던 로맨틱한 전망대는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현실은 그저 발 디딜 틈도 없는 유명 관광지에 불과했던 것이다. 차라리 나는 영화 속의 저 장면처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잘 보이는 루프탑 바를 갔어야 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고백하자면, 처음엔 다른 빌딩을 엠파이어 스테이트로 착각했었다. 왼쪽 사진의 화려한 탑으로 마무리된 하얀 건물이 영화에서 하트를 뿜어내던 바로 거기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크라이슬러(Chrysler) 빌딩이었고, 다소 투박한 양식의 오른쪽 건물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었다. 둘 다 미드타운에 있고, 높이나 첨탑 각도도 비슷해서 헷갈렸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두 건물의 공통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혹시 '마천루의 저주(Skyscraper Curse)'라고 들어본 적이 있는지.


어떤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짓는다고 하면 최대한 빨리 그 나라 주식 시장에서 빠져나오라.

- 존 캐스티의 <대중의 직관> 중


19세기 말, 미국에서는 마천루 붐이 일었고, 부자들은 점점 자신의 이름이 붙여진 최고층 빌딩을 지으려고 경쟁하기 시작했다. 자동차 갑부 월터 크라이슬러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 결과 1930년, 세계에서 가장 높은 320m의 크라이슬러 빌딩이 탄생됐고, 이듬해에 그보다 60m나 더 높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연이어 완공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경쟁보다 더 무서운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바로 세계 대공황이었다. 1929년부터 1930년대 후반까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엄청난 경제 불황으로 인해 새로운 빌딩 계획은 모두 중단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 1, 2위에 나란히 오른 이 두 건물 역시 불황기를 피해 갈 수 없었다. 특히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102층이나 되는 공간을 임대하지 못해 'Empty State Building'이라는 오명이 붙었으며, 공실률을 메꾸기까지 무려 10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이후 월드 트레이드 센터의 쌍둥이 빌딩이 완공된 1972~1973년에는 오일 쇼크가 터지면서 석유 수입국이던 미국은 석유 공황을 겪어야 했고, 말레이시아의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가 완공된 1998년도와 아시아에 IMF 위기가 덮친 1997년도 역시 교묘하게 시기가 맞물렸다. 이를 토대로 1999년에 도이치방크의 분석가인 앤드류 로런스가 최근 100년간의 사례를 분석하여 내세운 가설이 바로 '마천루의 저주'이다. 최고층 빌딩을 지을 때는 호황이었다가 완공될 때 불황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It's a sign.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에서 제일 많이 나온 대사다. 특히 멕 라이언은 줄곧 이 말을 되뇌며 순간순간에 충실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작은 신호 하나라도 놓치지 않는 것, 당장은 알 수 없지만 그게 뭔지 끊임없이 생각해보는 것, 다른 사람들이 제시해주는 답을 그저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답을 찾아 나서는 것... 그런 행동들이 그녀의 캐릭터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앤드류 로런스의 가설 '마천루의 저주'가 주는 메시지는 바로 영화 속의 멕 라이언처럼 뭔가 불안해질 때 주위를 다시 한번 둘러보라는 것이다.

로맨틱한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어두운 사연이 있었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다시 올라 차분히 도시를 내려다본다. 이렇게나 많은 건물들이 그동안 호황과 불황의 순환을 견뎌가며 뉴욕의 역사를 만들어내고 있었구나. 저 멀리 911테러로 무너진 월드 트레이드 센터 자리에 새로이 건설된 원 월드 타워가 보이자 나도 모르게 울컥해진다. 고난을 견뎌낸 자리가 더 찬란하게 빛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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