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raveLife Jul 22. 2020

도서관 예찬론

아메리카 기행 - 뉴욕 6

도서관은 내게 피난처이자 안식처였다. 퇴사 직전 레임덕에 빠져있던 나를 거둬준 곳이 사내 도서관이었고, 요가원을 운영할 때 공강 시간을 주로 보냈던 곳은 시립도서관이었으며, 이따금씩 집에서 답답할 때마다 찾아가는 곳은 마을도서관이었다. 운 좋게도 크고 작은 도서관들이 내 활동 무대로부터 늘 가까이 있어 주었다. 나는 그 점을 참 고맙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태생적으로 책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는 그림 그리는 걸 더 좋아했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런 나에게 책을 읽을 것을 강요했고, 잔소리는 역효과를 낳았다. 그 결과 나는 교과서 외에 다른 책은 웬만하면 보지 않게 되었다. 그런 내가 언제부터 책을 그리도 파기 시작했을까 생각해보니 대학생 때 도서관에서 한비야 님의 여행기를 발견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그것이 독서의 시작이었고, 다른 사람들의 여행기도 들춰보게 되었고, 여행 커뮤니티에도 가입하게 되었고, 거기서 추천된 다양한 장르의 책을 찾아 읽다 보니 어느새 다독가가 되어 있었다. (여행 커뮤니티는 여행 정보만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반적인 고민과 팁들을 얻을 수 있는 일종의 종합정보센터이다.)


나는 가능하면 약속 장소를 서점으로 잡거나, 근처에 도서관이 있으면 약속을 기다리는 장소로 활용하는 편이다. 서점은 자유분방하게 돌아다닐 수 있고, 테마별 큐레이션이 잘 되어 있고, 트렌드를 한눈에 알 수 있지만, 앉을 수 있는 공간의 절대 부족으로 머무는 시간이 결코 길지 않다. 도서관은 서점보다 경직되어 있지만, 고서나 비인기 도서가 보관되어 있을 확률이 높고, 편하게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많다. 그 공간적 여유로움 때문에 도서관은 서점과 카페의 중간계처럼 느껴진다. 나는 가끔 도서관에 가면 큐레이터라도 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렇게 탐색에 탐색을 거듭한 끝에 필요한 책을 양껏 골라와서 빈 책상에 앉아 나를 브랜딩하는 그 시간이 참으로 좋다. 도서관은 내게 또 하나의 창조의 공간인 셈이다.


그래서 로어맨해튼에 한 달 살이 숙소를 구했을 때 제일 마음에 들었던 건 바로 옆에 공공도서관 분점이 있다는 것이었다. 도서관의 분점(branch)이라니 무슨 프랜차이즈도 아니고... 그런데 알고 보니 뉴욕의 공공도서관(New York Public Library)은 좀 독특한 구조였다. 뉴욕시에서 운영하는 '공립도서관'이 아니라, 19세기 부자들의 사설 도서관을 통합하여 민간단체에서 운영하고 있는 '사립도서관'으로, 여기서 'Public'이란 '공중을 위해 열려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뉴욕의 공공도서관은 자국민이든 외국인이든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공공도서관 본점은 맨해튼의 미드타운 한가운데 있다. 마치 그리스 신전과도 같은 웅장한 건물이 빽빽한 마천루 사이에서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책만 보는 게 아니라 가족 단위로 견학을 오기도 하고, 시원한 대리석 로비에서 담소를 나누었으며, 뒤편에 있는 브라이언트 공원에서 각종 액티비티를 즐겼다.

뉴욕 공공도서관의 백미는 3층에 있는 Rose Main Reading Room이다. 호화롭게 꾸며진 천장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해지는데, 길다란 책상과 자리마다 설치된 은은한 조명, 그리고 빵빵하게 터지는 와이파이 같은 부대시설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궁전 같기도 하고 갤러리 같기도 한 이 우아한 공간에서 어찌 감히 책을 읽을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여기엔 고서밖에 없고, 현대 도서를 찾으려면 지하로 내려가야 한다.) 이런 공간은 단연코 본점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

도서관에서 무료로 운영되는 프로그램 역시 본점이 제일 다양한데, 수요일과 토요일에는 알려지지 않은 인디 영화를 틀어줬다. 영화를 좋아하기도 하고, 영어 공부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아서 꾸준히 참석했는데, 주로 노년층이 많이 오는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공공도서관은 그야말로 다양한 연령대가 다양하게 활용하는 공간이었다. 한편으로는 영화와 별로 친하지 않은 우리 부모님 세대가 생각나서 좀 짠해지기도 했다. 젊었을 때는 먹고살기 바빠서 문화를 못 즐기셨고, 노년이 되어서는 새로운 문화에 적응을 못하시는 우리 부모님들이...

숙소 바로 옆에 분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드타운의 본점을 고수한 제일 큰 이유는 바로 공공도서관의 안마당 같은 브라이언트 공원(Bryant Park) 때문이었다. 순수하게 잔디밭만 깔린 이 공원에서는 요일별로 다양한 액티비티가 제공되고 있었는데, 공원 한쪽의 Reading Room에서는 reel talk, book club 등의 다양한 강좌가, 중앙 잔디밭에서는 yoga, movie night 같은 각종 이벤트가 무료로 진행되었다. 그야말로 도시 한중간에 온 시민이 즐길 수 있는 지식의 전당이 있는 셈이다.


나는 뉴욕에서 한 달을 사는 동안 비록 처음에 계획했던 어학원을 다니지는 못했지만, 그대신 뉴요커들이 참여하는 문화 강좌를 들을 수 있었고, 가끔 신간 도서를 소개하는 날에는 무료로 책을 받아왔으며, 그렇게 뜻하지 않게 원서도 읽게 되었다. 자막 없이 영화를 보면서 귀도 아주 약간 뚫린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도 들었다. 그렇게 언어는 그 지역 사회에 스며드는 순간 자연스럽게 다가왔고, 뭔가 억지로 하려고 하지 않아도 습관으로 배게 되었다. (그렇다고 아주 유창해진 것도 아니지만.) 그러니 어딜 가든 그 지역의 도서관 시설을 적극 이용하기를 추천한다. 미국의 도서관 이용기는 각 도시별로 또 찾아오겠다. I'll be back.

이전 06화 뉴욕의 잠 못 이루는 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