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raveLife Oct 08. 2020

스타트업의 도시

아메리카 기행 - 샌프란시스코 1

샌프란시스코는 로스앤젤레스만큼 덥지 않아서 좋았다. 같은 캘리포니아 주인데도 선키스트 같은 태양은 대낮에나 해당될 뿐 아침저녁으로는 꽤 쌀쌀해서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가을이 사뭇 반가운데, 사방에는 단풍까지 물들어 있어서 더욱 설렌다. 하지만 샌프란시스코는 굳이 가을이 아니어도 좋을 것 같다. 골목마다 화단이 가꿔져 있을 만큼 조경이 잘 되어 있고 건물도 하나같이 다들 예쁘다. 심지어 노숙자의 텐트에서도 꽃이 피어있는 걸 보면 스콧 매켄지의 오래된 노래가 결코 과장이 아님을 새삼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설레게 한 건 바로 IT 산업의 성지 '실리콘밸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시내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고, 여행자의 입장에서 굳이 거기까지 갈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업계에서 10년 가까이 굴렀던 이력과 관심으로 충분히 그 기운을 느껴볼 수 있지 않을까. 뭐 이런 기대도 해보지만, 그런 몹쓸 기대와 망상은 나를 엉뚱한 선택으로 몰고 갔다.


'Startup House SF Downtown'


내가 이 예사롭지 않은 숙소를 예약하게 된 건 순전히 이름 때문이었다. 신산업이 마구 생겨난다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이만큼 어울리는 이름이 또 있을까. 거기다 물가가 살인적으로 비싼 이 도시에서 도미토리도 아니고 싱글룸이 65$밖에 안 했다. 그것도 한참 중심가인 유니언 스퀘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런 건 당장 예약해야 된다며 얼른 결제하고, 며칠 후 결제가 완료되었다는 문자를 받았는데, 원금보다 하루치가 덜 결제되어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냐고 숙소 측에 문의했더니 fully pre-paid 됐으니 걱정말라고, 나머지는 디스카운트로 생각해 달라는 아름다운 내용의 답장까지 받은 것이다. 이런 히스토리가 있었기에 밤새 불편한 메가버스를 견뎌가며 초긍정의 상태로 도착했는데...

허름한 창고 같은 건물에 당황하고, 번지수가 없어서 두 번 당황했다. 미심쩍어하며 벨을 눌렀더니 곧 직원이 나와서 문을 열어 주었다. 아니기를 바지만, 여기가 바로 그 이름도 찬란한 'Startup House SF Downtown'이었다스타트업이라고 해서 새 건물에 새 시설이 완비되어 있을 줄만 알았던 나의 기대는 그렇게 처참히 무너지고...

하지만 여기서 뭔가 스타트업을 하긴 하는 모양이었다. 숙소의 한가운데에는 잡동사니를 모아둔 세미나실도 있고, 화이트보드에는 늘 뭔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으며, 심지어 세미나실에서 2층의 내 방으로 연결된 통풍구(여긴 창문이 없고 대신 통풍구가 있음. 저 커튼 뒤에 가려진 공간은 그냥 벽임)를 통해 밤 10시마다 회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직원한테 물어보니 숙소 주인이 스타트업 관련해서 대학생이나 자영업자들을 모아놓고 가끔 강연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1층 식탁에서 아침을 먹다 보면 숙소 주인을 찾는 방문객을 꽤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아마도 그들에게는 편한 복장으로 돌아다니는 내가 스탭으로 보였나 보다. 외부인들이 자꾸 나한테 뭔갈 물어보니 숙박객들도 덩달아 숙소 관련 문의를 나한테 해왔다. 나도 게스트인데...


이 독특한 숙소에 묵은 덕분에 여러 인종의 여러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마주칠 수 있었고, 강연 내용이 그대로 들리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스타트업 개론도 들을 수 있었지만, 이곳의 본업은 어디까지나 숙박업이다. 건물의 마감재도 덜 끝난 상태에서 날조된 사진으로 숙박객을 끌어들이고, 스탭도 제대로 배치해두지 않은 것은 일종의 직무 유기가 아닌가. 심지어 세미나실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강연이 있는 날에는 사람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더군다나 밤 10시 넘은 시각에 거의 모든 방의 통풍구가 연결되어 있는 세미나실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강연을 하겠다는 발상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이런 문제 때문인지 몰라도 결국 이 숙소는 그해 겨울쯤 문을 닫았다. 7월에 부킹닷컴에서 예약을 받기 시작했으니 숙박 플랫폼에서 거의 반년을 버틴 셈. 물론 한 달 장기 렌트는 그 이전부터 받았다고는 하나, 여기를 한 번쯤 거쳐간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곧 부정적인 후기가 이 숙소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는 걸.


숙소 주인은 차라리 숙박업 말고 강연에 더 집중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강연 장소가 필요해서 마련한 공간에 방이 남아서 숙박업을 한 것 같은데 부 아이템을 잘못짚었다. 청결에 관심도 없는 사람이 감히 공간을 대여하는 사업을 하려 하다니. 아니면 직원이라도 깔끔한 사람을 들이던가. 일도 사람도 실패했던 그에게서 창업이란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보게 되어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래도 샌프란시스코에서 위험하지 않은 위치에 합리적인 가격으로 묵을 수 있었던 건 감사한 일이기에.

참고로 시내에서 스타트업의 향기를 느끼고 싶다면 SOMA(South of Market) 지역으로 가볼 것을 추천한다. SOMA는 과거의 공장지대를 재개발한 구역으로, 중심가보다 상대적으로 임대료가 저렴해서 스타트업 기업들이 많이 입점해 있는데, 한때 구글을 제치고 입사 1순위였던 에어비앤비 본사도 바로 이곳에 있다. 간판이 따로 없어서 헷갈리긴 했지만, 커다란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쾌적한 모델 하우스 같은 회사 내부를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화사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의 기업 문화를 자랑하는 에어비앤비도 아직은 성공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2020년 코로나19의 위기는 힐튼 호텔보다 우위의 평가를 받았던 이 기업도 피해 갈 수 없었으니. 하지만 에어비앤비의 출발점, 즉 집값이 비싼 샌프란시스코에서 남는 방을 저렴하게 제공하겠다는 초심을 되새겨 본다면 또 다른 답이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때 이 도시에서 진정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창업자들은 알고 있었으니까. 그 과정에서 지하세계(?)의 민박업을 플랫폼 상으로 끌어내어 투명한 경제가 가능하도록 한 것은 덤으로 이루어진 업적이니. 중요한 것은 시대가 추구하는 가치를 담아내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가보지는 않았지만 게티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