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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veLife Oct 10. 2020

꽃길 걸으세요

아메리카 기행 - 샌프란시스코 2

샌프란시스코의 언덕은 거의 킬힐(kill hill) 수준이다. 도시 자체는 그렇게 넓지 않은데 (오히려 미국의 다른 도시에 비하면 아담한 사이즈) 중간중간 예상치 못하게 튀어나오는 언덕 때문에 가끔 걷기 힘들어질 때가 있다. 그럼에도 여기가 뉴욕 다음으로 애정하는 도시가 된 건 바로 아름다운 조경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는 집집마다 꽃이 피어있는 것도 모자라서 길가에도 화단이 조성되어 있는데, 그 꽃길 너머로 바다가 펼쳐지는 환상적인 풍경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샌프란의 수많은 언덕 중에서도 나는 특히 러시안 힐(Russian Hill)을 사랑했다. 바로 여기에 세계에서 가장 구불구불한 도로 롬바르드 꽃길(Lombard Street)이 있기 때문이다. 단 한 블록에 해당되는 짧은 구간이 27도로 경사진 것도 모자라서 무려 8개의 커브길이 있는, 세상 가장 이색적인 도로가 아닐까. 회단에는 색색의 수국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거기다 주변 가옥의 이름 모를 꽃까지 합세해서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나는 지금도 이 사진을 보고 있으면 그때 그 장소가 떠오르면서 굽이진 꽃길을 따라 빙글빙글 돌고 있는 느낌이다. 이런 작은 추억에 미소 지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여행이 주는 근원적인 위로가 아닐까.

러시안 힐에서 노스 비치(North Beach)로 가는 길 정면으로 악명 높은 감옥이 있는 알카트라즈 섬(Alcatraz Island)이 보인다. 이렇게 경치 좋고 날씨 좋고 집값 비싼 곳에서 감옥 뷰라니 이거야말로 아이러니. 물론 지금은 감옥이 없어지고 관광특구로 재정비되었지만, 과거의 어두운 역사와 현대의 고도화된 모습이 보여주는 '다양성'이 바로 샌프란시스코의 정체성이 아닌가 싶다.

게이 거리로 유명한 카스트로(Castro) 지역은 바로 그 다양성 중의 한 면모를 볼 수 있는 곳이다. 곳곳에 무지개가 펄럭이고 있는 이곳에는 도로의 횡단보도는 물론이고, 스타벅스의 벽면까지도 무지갯빛으로 물들어 있다. 그 찬란한 빛은 게이 거리가 시작되는 지점의 커다란 'Gilbert Baker Memorial Rainbow Flag'로 수렴된다.


The gayest shop ever


어떻게 하면 가장 게이처럼 보일 수 있을까 연구한 흔적이 역력한 거리의 한 간판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성소수자들이 이토록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며 살 수 있다는 것에서 '다름'을 존중하는 이 도시의 문화가 느껴진다. 아름다운 도시의 조경만큼이나 아름다운 '다양성'이라는 미덕이.


이 지역에 미국 최대의 게이 타운이 들어선 데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이 크다. 기나긴 전쟁 중 군 내부에서는 자연스럽게 동성애가 성행하게 되었고, 해군의 대표 기지였던 샌프란시스코에서 전역한 수많은 성소수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정착한 곳이 바로 이곳 카스트로 지역이다. 그들이 마이너 집단으로서 인권을 주장하고 법적으로 보호받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영화 <밀크>를 보면 '편견'이란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카스트로 바로 옆에는 벽화로 유명한 미션(Mission) 지역이 나온다. 히스패닉계 소수 인종이 거주하는 곳으로, 우범지대로 자주 거론되기도 하는데 막상 가보면 소문만큼 위험하지도 않다. 오히려 골목의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이런 수준급의 벽화를 감상할 수 있으니 이만한 현대미술관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인종이 달라서, 종교가 달라서, 취향이 달라서 그때마다 편견이 생긴다면 이런 다양한 문화가 꽃 피어날 수 있었을까.


My name is Khan and I'm not a terrorist.


샌프란시스코를 배경으로 한 인도 영화 <내 이름은 칸>은 9.11 테러 이후 미국 사회에서 특정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에 대해 섬뜩하게 그리고 있다. 무지한 선입견이 무고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영화의 메시지는 비단 종교만을 거론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저 대사 안에 '칸' 대신 인종이 들어갈 수도 있고, 성소수자가 들어갈 수도 있고, 영화 <기생충>으로 화두에 올랐던 빈부격차 문제가 들어갈 수도 있다.


가난하지만 테러리스트는 아닙니다.

게이지만 테러리스트는 아닙니다.

학벌은 낮지만 테러리스트는 아닙니다.


등등등... 더 무서운 건 '상식'이라는 이름 하에 아직도 수많은 편견이 이 세상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회는 이렇게 진화 발전되고 있음에도 여전히 과거의 잣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슬픈 일이다. 나 역시 그런 모순을 안고 살아가고 있음을 다양성이 한껏 존중되는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보니 새삼 깨닫게 된다.

카스트로와 미션 지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알라모 스퀘어(Alamo Square)가 있다. 샌프란의 언덕 중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여긴 늘 올 때마다 저 공원 꼭대기까지 못 오르고 포기해버리기 일쑤다. 정상에 오르는 건 힘들 거라는 몹쓸 편견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편견을 깨고 올라가면 언덕 아래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시야를 얻을 수 있다. 광장을 에워싸고 있는 빅토리아 에드워드 풍의 멋진 가옥들이 미세하지만 조금씩 다른 모양과 색깔을 갖고 있음을. 저 멀리 시청의 돔 위로 황금빛이 반짝이는 멋진 뷰도 볼 수 있음을. 그러니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힘들더라도 이 다채로운 꽃길을 모두 걸어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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