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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veLife Oct 23. 2020

물길, 그 치명적인 매력

아메리카 기행 - 샌프란시스코 5

샌프란시스코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태평양을 접하고 있는 해안 도시라는 점이다. 시내 어디서든 바다로 쉽게 접근이 가능하며,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언덕 경사가 점점 심해져서 걸어 다니기엔 버겁지만, 그 대신 마음만 먹으면 시내 어디서든 바다를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대충 언덕길 아무데서나 시선을 멀리 두면 이런 뷰가 나오니 어찌 이 도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나. 물론 걷기를 좋아한다는 전제 하에서지만. 사진에서 보다시피 거의 2~3개 층에 해당하는 경사가 몇 블록에 걸쳐서 이어지기 때문에 바다로 향하는 내리막길은 시야가 확 트이면서 한없이 설레지만, 시내로 돌아올 때는 그만한 대가를 다시 치러야 한다. 만약 킬힐이 버겁다면 버스나 케이블카를 타는 방법도 있으니 참고하시길.

바닷가로 나가는 길 중 내가 주로 이용했던 루트는 숙소가 있는 유니언 스퀘어에서 금융가를 지나 페리 빌딩에 들러 간단한 요기를 한 다음, 피어(pier)의 넘버를 세며 해안가를 산책하는 것이다. (참고로 페리 빌딩은 일제시대 의열 투쟁이 일어났던 역사적인 장소인데, 이에 대해서는 중국의 임시정부 편에서 언급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페리빌딩에서 시작된 pier 1은 어부의 선착장(Fisherman's Wharf)이 있는 pier 45에서 끝이 난다. 어부의 선착장은 1800년대 골드러시로 이곳에 정착하게 된 이탈리아 어부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그들이 주로 잡았던 것이 Dungeness crab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게 요리가 발달하였고, 바닷가라면 으레 그렇듯 커다란 사워도우 빵을 그릇 삼아 담아낸 뜨끈한 clam chowder도 이곳의 명물이 되었다.

빠네 파스타를 연상시키는 비주얼에 혹해서 사 먹은 클램 차우더는 이름 그대로 시큼한 사워도우 빵이 못내 거슬렸지만, 거센 바닷바람을 피해 들어간 식당에서 들이킨 뜨끈한 수프 한 모금은 어딘가 영혼을 위로해 주는 마력이 있었다. 그 시절 거친 바닷일을 했던 어부들에게도 클램 차우더는 잔뜩 얼어 있던 영혼을 따뜻하게 녹여주는 그런 존재였으리라.


영혼을 위한 조개 수프 한 그릇 하고서 기라델리 초콜릿 공장이 있던 자리에 새롭게 조성된 광장에 앉아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Waterfront의 역사가 그렇듯 샌프란시스코 역시 어촌으로서의 역할이 쇠퇴하면서 이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깊었을 것이다. 그 사이 이 지역에 있던 델몬트 통조림 공장도, 기라델리 초콜릿 공장도 모두 사라지고 이 일대는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되는데, 특이한 건 예전의 목조 구조물을 그대로 살려냈다는 점이다. 과거의 역사를 간직하고자 하는 이 도시의 스토리텔링이 느껴진다.

어부의 선착장 앞으로 길게 이어지는 pier 45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거대한 잠수함 USS Pampanito와 수송선 SS Jeremiah O'Brien이 있다. 이 두 전함 사이로 조그만 섬 하나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데, 저기가 바로 잔혹하기로 악명 높은 감옥이 있었던 알카트라즈 섬(Alcatraz Island)이다.


이 섬에 처음부터 감옥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1775년 스페인의 탐험가 후안 데 아얄라가 발견했을 때만 해도 바위투성이에 펠리컨(스페인어로 alcatraz)만 돌아다니는 불모지였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1800년대 골드러시로 사람들이 몰려들자 연방 정부에서 도시를 통제하기 위해 이 섬에 육군 기지를 세웠고, 남북전쟁 때 포로수용소의 기능이 더해지면서 점차 교도소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사실 거리로 따지면 뭍에서 불과 2km밖에 안 되지만, 급격히 빠른 조류와 낮은 수온, 거기다 상어까지 대거 출몰하는 지역이어서 결코 쉽게 탈출할 수 없는 구조라고 한다. 그럼에도 탈옥 시도는 숱하게 있어왔고, 몇몇은 행방이 묘연해진 걸 보면 아마도 상어밥이 되지 않았을까 추측도 해본다. 사실 탈옥만큼 감칠맛 나는 소재가 없기에 할리우드 영화에서 꽤 자주 등장하는데, 그중 영상미로 따지자면 1996년에 개봉한 <The Rock>이 레전드지만, 내용적으로 임팩트가 강했던 영화는 그 전년도에 나온 <일급 살인>이 아닐까 한다.

이 영화는 알카트라즈 교도소를 폐쇄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1941년도의 '교도소 내 살인사건'을 바탕으로 각색된 작품이다. 영화의 극적인 효과를 위해 실제 헨리 영의 범죄보다 가벼운 죄목으로 다룬 것과 일급 살인 당시 찔렀던 부위가 목이 아니라 복부이고, 살인 도구도 숟가락이 아닌 칼이라는 점에서 실제 사건보다 과장된 부분이 다소 존재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재활'이라는 명분 하에 암묵적으로 발생했던 교도소 내의 비인간적인 실태를 세상밖으로 드러냈다는 점이다.


재활의 정의는 훈련과 치료를 통한 심신과 도덕적 건강의 회복이다.


영화의 도입부에 나왔던 헨리 영의 재활교육은 일제시대의 고문 장면을 연상케 할 정도로 잔인하다. 그 결과 헨리 영은 똑바로 걷지도 못하고, 정신 착란을 일으킬 정도로 심리 상태도 불안정해졌다. 이것이 '인간 교화'를 목표로 하는 교도소의 역할로서 정당화될 수 있을까.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알카트라즈 감옥은 1963년에 폐쇄되었지만, 올바른 재활교육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 섬은 여전히 우리에게 생각거리를 던져 준다. 이는 캘리포니아 주의 홈리스 편을 쓰면서 고민했던 사회 복지 차원으로 다시 귀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어부의 선착장에서 해안가를 따라 계속 걸어가면 태평양으로 넘어가는 관문인 골든게이트 해협 위로 금문교(Golden gate bridge)가 영롱한 붉은빛을 띠며 모습을 드러낸다. 샌프란시스코를 검색하면 제일 먼저 나오는 상징과도 같은 이 다리는 거센 조류와 안개가 잦은 기후, 그리고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지형이라는 여러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4년 만에 완공되어 불가능을 가능케 한 '기적'의 아이콘으로 대표되기도 한다. (참고로 미국토목학회에서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고 있다.)


옛것을 보존하면서 현대적인 시민 공간을 재창조해낸 것, 전쟁과 교도소라는 어두운 역사를 극복하고 밝은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 그리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도록 꿈꿀 수 있게 해준 것, 이것이 샌프란시스코의 물길이 내게 보여준 것들이다. 그 치명적인 매력들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꿈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갈 수 있는 힘이라도 얻은 듯하다. 부디 찾을 수 있기를,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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