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 <동주>, <밀정>, 그리고 드라마 <제중원>, <이몽>... 이런 임정 시대극에서 늘 단골로 나오는 장면과 지역이 있다. 조국에서 할 것(?) 다 하고 갈 데(?)까지 갔다가 결국 마지막으로 향하는 곳은 상해. 그래서 나도 상해에선 임시정부를 반드시 찾아야 했다. 역사에 아주 관심이 많았던 것은 결코 아니지만, 저 위에 거론된 작품들을 감명 깊게 봤기 때문에 그 배경으로 나온 상해와 어느새 주파수가 맞춰져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는 꼭 가보리라, 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야기를 하려면 상해뿐만 아니라 중국의 항저우와 몽골의 울란바토르, 그리고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까지 이야기가 연결된다. 이번 글은 참으로 길어질 것 같다.
상해의 석고문 가옥이 밀집되어 있는 프랑스 조계지 안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숨어' 있었다. 저렇게 간판을 가로수와 가로수 사이에 '숨겨' 놓았으니 나뭇잎에 가려져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고, 한참을 이 근처에서 헤매다가 절규하며 고개를 치켜든 순간 거짓말처럼 저 간판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비밀조직 아니랄까 봐 진심 꼭꼭 숨어 있었군요...
외벽의 석고문을 통과해서 들어가면 이렇게 연립주택 형태의 건물이 늘어서 있는데, 저기 경비원이 지키고 서 있는 곳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지이다. 들어가면 정면에 김구의 흉상 뒤로 태극기가 걸려 있는데, 저때의 태극마크 색은 분홍과 빨강이었다.
임시정부가 상해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여러 곳을 거쳐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고 다음 달인 4월 11일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홍커우공원(현 루쉰공원)에서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투척한 이후 일본의 감시망을 피해 항저우에서 충칭까지 여러 번에 걸쳐 옮겨 다녀야 했다.
마침 상해 다음 일정이 항저우여서 임시정부 구지를 잊지 않고 찾아갔는데, 상해와 같은 석고문 건물에 같은 색깔의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임시정부가 항저우로 옮길 때쯤 실질적 리더였던 김구는 임정의 활동 범위를 미주와 멕시코, 하와이, 쿠바 등지로 넓혀 교민들의 성금을 확보하여 산하 조직인 한인애국단을 창설하였는데, 그 훨씬 이전부터 미국에서 활동했던 주요 인물이 바로 도산 안창호이다. 그는 교육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190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소학교에서 영어부터 배우면서 한인들의 비참한 모습을 접하고 민족계몽운동을 추진하였다.
나를 건전한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이것이 도산 안창호 선생의 계몽 정신이다. 그는 1907년에 잠시 귀국하여 여러 교육기관을 설립함으로써 민족의 계몽운동을 국내에서도 이어나가게 된다. 그로부터 1년 뒤 샌프란시스코에서 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1908년 3월 2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페리 빌딩에서 장인환 의사와 전명운 의사가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한 사건이 일어났다. 스티븐스는 을사조약(1905년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한 조약)과 한일신협약(1907년 우리나라의 주권을 박탈하기 위한 조약, 정미년에 맺은 7개의 조약으로 '정미 7조약'이라고도 함) 체결에 앞장선 미국인으로,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으로부터 훈장까지 받은 인물이다. 그가 1908년 3월 21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의 한국 지배에 대한 타당성을 공표함으로써 한인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고, 이에 장인환과 전명운은 동시에 스티븐스의 암살을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이틀 뒤인 1908년 3월 23일, 페리 빌딩으로 들어가는 스티븐스를 전명운이 먼저 총격하지만 불발되고, 뒤이어 장인환이 쏜 총에 맞아 결국 사망한다. 불발된 전명운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지만, 장인환은 2급 살인죄로 25년형을 선고받고 다음과 같이 최후 진술을 했다고 한다.
조국해방과 자유의 민주대한(民主大韓)을 건설하기 바란다.
이것이 만주의 하얼빈 기차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을 때(1909.10.26)보다 무려 1년이나 전에 일어난 일이다.
이 사건으로 동포들의 커뮤니티에 대한 필요성을 느낀 안창호는 1910년 캘리포니아 주에 대한인국민회를 창설하여 독립운동을 더욱 조직적으로 펼쳐나가게 된다.
대한인국민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USC)가 있는데, 그 안에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가족들이 기거했던 가옥이 남아 있었다. 지금은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대학 내 한국학을 연구하는 연구소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대한인국민회가 설립될 때쯤 안창호가 국내 세브란스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만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몽골의 슈바이처라 불리는 이태준 열사이다. 드라마 <이몽>에서 이요원의 의대 선배였다가 행방이 묘연해진 '유태준'이라는 인물이 등장했을 때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 몽골인의 털가죽 옷을 입고 있는 김태우를 보며 울란바토르의 이태준 열사 기념공원을 떠올렸다. 극 중에서는 '유태준'으로 나왔지만, 직업이 의사인 것과 활동 지역으로 보아 울란바토르에서 본 그가 확실했다. 아마도 극 중 이요원과 엮기 위해서 팩트에 픽션을 가미하면서 이름도 살짝 바꾼 것 같다.
몽골의 울란바토르에서 방황하던 어느날 우연히 발견한 이태준 열사 기념공원은 그야말로 새로운 발견이었다. 비록 전시물은 사진 몇 장과 텍스트가 전부였지만 몽골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가 있었다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10년 후 안방에서 드라마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책에서 배운 역사적 사실을 점검하기 위해 현장에 갔다가 몰랐던 사실을 하나씩 알게 되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미처 정리를 다 못하고 있을 때 드라마나 영화로 다시 내 앞에 나타나는 순간, 그 공간적 배경들이 지난 수년간 다녀온 경험과 입체적으로 맞춰지면서 하나의 메시지로 다가왔다.
그렇게 외화를 써가며 보고 들은 경험들을 언제까지 정리도 안 하고 있을 텐가.
브런치에 여행기를 다시 정리하면서 그동안 나라별, 도시별로 써내려가던 단편적인 습관이 조금은 입체적으로 승격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번 편에서는 세 나라와 다섯 도시에 얽힌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한데 묶어보았다. 그러면서 새삼 깨달은 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이 국호를 쓰기 이전부터 글로벌하게 활동을 해왔다는 것이고, 과연 그 독립운동의 결실을 제대로 봤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 시대에 글과 행동으로써 독립운동을 한 사람도 있었고, 사회의 버팀목이 되기 위해 열심히 일한 농민들도 있었다. 독립운동가든 백성이든 다 같이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았으니 누구는 칭송하고 누구는 칭송 안 하고를 떠나서 하나의 역사로 잘 정리해놓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우리의 역사를 새로 써 나가야 한다. 여기서 다시 생각해볼 것은 우리가 과연 참된 독립을 했는가이다. 일본은 미국한테 항복한 것이지, 대한민국에 항복한 적이 없으니 우리는 아직 주권을 찾은 게 아니지 않은가. 지금까지 희생하신 조상들의 역사를 보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도산공원에 전시되어 있는 도산의 말씀 중 하나가 그 답이 될 듯하여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