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2번째로 힘든 시기가 있었다. 그때 읽었던 책 중 어딘가에 이런 말이 나와 있었는데, 과거를 지우고 싶을 때에는 중국의 통리(同里)라는 수향 마을에 가 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선은 통리가 어디인지 찾아보았더니 상해에서 버스로 2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녹차라테 수준의 짙은 물이 흐르는 시골 마을이었다. 물빛은 비록 청정해 보이지 않았지만,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은 고즈넉한 풍경에 마음이 동한 것도 잠시, 우리나라 대표 포털 사이트에 뜬 연관 검색어에 또 다른 수향 마을 우쩐(乌镇)이 눈에 띄었다. 통리는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져서 관광객이 미어터지니 그보다는 한적하면서도 옛 모습이 더 잘 보존된 우쩐이 운하 마을로 새롭게 뜨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쩐으로 가볼까 하고 교통편을 알아봤더니 통리나 우쩐이나 상해에서 버스로 바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택시든 페리든 한 번은 갈아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고, 무엇보다 마을 입장료가 100위안이나 해서 망설여졌다. 입장료라니, 이런 시골에 가는데 굳이 돈은 왜 내는 건가... 물론 100위안은 우리 돈으로 2만 원도 안 되는 금액이지만, 입장료를 내면서까지 가야 할 명분을 찾지는 못해서 좀 더 알아보다가 결국 입장료가 없는 쑤저우(苏州)로 목적지가 정해졌다.
그리하여 가게 된 나의 첫 수향 마을 쑤저우에는 물의 도시에 관한 거의 모든 로망이 담겨 있었다. 여행 편의시설과 박물관, 졸정원 등 볼거리가 밀집된 평강로(平江路)에는 곳곳에서 물길이 흐르고 있어 무더운 여름날의 더위를 반감시켜주었고, 쑤저우풍 옛 가옥과 저잣거리가 그대로 재현된 모습은 마치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가슴을 설레게 하는데,
당나라의 문인 백거이가 지방관으로 있을 때 개척했다는 운하 칠리산당(七里山塘)에서 그 아름다움이 그만 절정에 달하고 말았다. 역시 아티스트가 설계한 곳은 다르구나. 백거이가 누구던가. 바로 양귀비에 대한 현종의 애틋한 사랑을 길디긴 시 <장한가(长恨歌)>로 표현한 당대의 로맨티시스트가 아니던가. 여기서는 노천카페에 앉아 하루 종일 글을 써도 좋을 것 같다.
쑤저우와 함께 백거이가 지방관으로 지내면서 물길을 개척했던 항저우(杭州)는 도심 곳곳에 흐르는 수로들이 시내 중심에 있는 거대한 서호(西湖)로 수렴되어 또 다른 장관을 연출한다. 남송시대부터 수도였던 항저우는 쑤저우와 함께 '천상천당 지하소항(天上天堂 地下苏杭)'이라 칭송받을 정도로 경관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강남을 대표하는 도시였는데, 이 일대가 이토록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물길을 이용한 외부와의 교류에 활발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양쯔강 유역을 중심으로 벼농사가 발달하고, 풍부한 생산력은 상업으로 이어져 운하길을 이용한 무역을 통해 일찍이 국제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으리라. 그리고 그런 항저우의 기운이 오늘날 알리바바를 창업한 마윈을 낳은 것이고. 참고로 항저우는 마윈의 고향이자 알리바바의 본사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항주사범대에서 영어교육을 전공한 마윈은 현재 경영에서 물러나 인재 양성에 힘쓰겠다고 선언한 바 있는데, 그런 이유로 빌 게이츠와 함께 앞으로의 행보가 상당히 기대되는 분이다.
항저우에서 눈여겨볼 만한 것이 또 하나 있다면 바로스타벅스 서호 지점이다. 여기는 지금까지 가 본 스타벅스 매장 중 가장 그 지역에 잘 스며든 곳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독특했는데, 저렇게 울창한 버드나무 속에 파묻혀서 섬처럼 붕 떠 있는 외관은 신비감마저 들게 했다. 때마침 우기가 시작되는 9월이어서 항저우는 하루가 멀다 하고 비가 내렸지만, 범람할 것 같은 서호를 바라보며 따뜻하고도 익숙한 맛의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던 순간을 나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서호에는 단교잔설, 평호추월 등 명소 10군데를 일컬어 서호십경(西湖十景)이라 부른다는데, 이제는 현대판 서호십경을 재정의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스타벅스 서호 지점을 포함해서 말이다.
수향 마을인 줄도 모르고 오직 루쉰의 흔적을 좇기 위해 왔다가 멋들어진 벽화에 반하고, 한없이 서민적인 운하의 모습에 두 번 반한 소흥(绍兴). 벽화 끝에서 무거운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이 바로 중국 근대문학의 대가 루쉰(魯迅)이다. 소흥은 그가 태어나고 문학가와 혁명가로서 여러 작품을 집필했던 유서 깊은 곳이고. 하지만 유명세에서 뒤처지는지 쑤저우나 항저우보다 물길이 훨씬 발달해 있음에도 관광지다운 면모가 그다지 느껴지진 않았는데, 그래서 더 좋았다. 마침 우기가 한창이어서 날씨는 제법 스산했지만, 그렇기에 이곳 어딘가에 현대판 狂人이나 아Q가 살고 있을 것 같은 착각과 함께 그의 문학세계에 제대로 빠져들 수 있었으니.
그런데 나는 이곳 수향 마을에 와서 내 버거웠던 삶의 무게를 내려놓았던가. 그저 비루했던 과거를 아무 상관도 없는 곳에 와서 던져버리려고 비행기를 타고 여기까지 왔던 걸까. 그러기엔 이곳들이 너무나 소중했다. 저 멀리 지구 끝까지도 가 봤지만, 결코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내 삶의 무게는 나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었으니. 그때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세상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시련만 줄 뿐, 그 시련을 훈련이라 생각하고 지나가면 한 단계 성장한다는 것도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러니 다가오는 환경을 기꺼이 흡수하시기를. 당신의 방식으로 쿨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