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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veLife Apr 30. 2020

계림 산수는 갑이 아니다

桂林山水甲天下 계림의 산수는 천하에서 갑이고

阳朔山水甲桂林 양삭의 산수는 계림에서 갑이다.


라고 남송 시대의 문인 왕정공(王正功)이란 사람이 그랬다고 한다. 그 시대에도 '갑'질은 있었던 모양이다. 하물며 산수에도... 어쨌든 그토록 '갑'이라고 하니 궁금해지긴 하여 항저우에서 밤기차를 타고 계림으로 이동했다. 계림은 그 주위가 기이한 모양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을 뿐, 광서장족자치구(广西壮族自治区)의 오랜 성도여서 사실상 대도시에 가깝고, 이 구역의 진정한 자연을 보려면 양삭(阳朔)으로 가야 된대서 다시 버스를 타고 2시간을 더 이동했다. 가는 내내 버스에서는 영화 <소림사>를 틀어줬는데, 알고 보니 그 배경이 바로 이곳 계림이라고 한다. 하지만 진짜 소림사는 여기가 아니라 강북으로 한참 올라간 정저우(郑州) 시에 있었다. 홍콩 영화진들이 만들어야 하니 지역적으로 가깝고 산세가 오묘한 곳을 찾다가 계림이 얻어걸린 모양이다. 어쨌든 이연걸의 풋풋한 데뷔 시절의 모습을 보는 맛에 2시간이 후딱 지나가버렸다.

버스에서 내려 양삭의 중심가로 들어가는데 마을의 모습이 점점 흥미로워진다. 기이한 산들이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깡시골인데, 관광지로써 갖춰야 할 인프라는 모두 갖춰져 있고, 길 위 어디서나 와이파이가 빵빵하게 터졌다. 심지어 메인 거리의 이름도 심플하게 외국스러운 서가(西街)다.

마을 어디에서나 영화 <아바타>에서 봤던 것과 비슷한 모양의 산봉우리를 쉽게 발견할 수 있으며,

마을의 끝은 이강(漓江)으로 수렴된다. 계림에서 양삭까지 83㎞에 이르는 이강은 카르스트 지형으로 형성된 수많은 봉우리를 감아 흐르는 신비한 매력 때문에

중국 화폐 20위안짜리의 뒷면에 오르는 영광을 안았다.

상류로 올라가는데 곧 해가 지려고 한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강의 漓자가 '스며들 이'였는데, 정말 이름 그대로 하염없이 강 속으로 스며드는 것 외에는 할 게 없는 곳이었다. 물론 찾아보면 얼마든지 즐길 거리가 많겠지만, 내 취향과는 맞지 않았다. 배를 안 좋아하니 이강 유람선을 타는 것도 물 건너가고, 장예모 감독의 영화를 사랑하는 1인으로서 인상 시리즈 중 하나인 <인상유삼저(印象刘三姐)>를 보려고 했는데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이것저것 포기하고 나니 더 이상 여기에 있을 명분이 없어진 것이다.


사람마다 그 지역과의 케미스트리라는 게 정말 있는 건지 진정 자연만 있는 곳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런 풍경을 보며 멍 때리는 것도 내 취향이 아니었고. 그동안의 여행으로 한 가지 발견한 게 있다면 개인적인 호불호가 점점 분명해진다는 것이다. 내가 정말 기대하고 준비를 많이 한 곳은 확실히 보고 느끼는 것이 다르고, 쓸 데 없는 행동을 할 틈도 없이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그런데 이번의 계림처럼 남들이 좋다고 하니 가는 길에 겸사겸사 들렀던 경우에는 대부분 실망과 후회가 뒤따랐다. 계림 산수가 갑이라는 건 그때의 버전이고, 지금은 지금 시대의 갑이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하자. 다른 사람에게는 별 매력이 없더라도 내가 영감을 얻고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된다면, 바로 거기가 나의 갑이 되는 곳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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