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2400m의 리장보다 무려 1000m나 더 높은 샹그릴라로 가는 길.
날씨가 확실히 추워졌다. 짐 깊숙한 곳에서 윈드재킷을 꺼내 입고 버스에서 내려 샹그릴라 시내로 나오는데 갑자기 멍해졌다. 그동안 내가 알던 중국의 모습과 확연히 다른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표현을 하자면 몽골의 울란바토르쯤 되는 분위기라고나 할까.
테무진(칭기즈 칸)을 오마주 하기라도 한 듯한 기마상과 몽골풍의 건물과 옛 몽골 문자를 닮은 글자까지 모든 것이 몽골스러웠다. 하긴 몽골제국과 중국의 등쌀에 한시도 바람 잘 날 없는 티베트였으니 몽골의 분위기가 남아 있는 것도 어느 정도 납득이 되긴 했다. 오히려 그런 열강 속에서 라마교를 전파하고, 지금도 몽골에서는 절반 이상이 티베트 불교를 믿는다고 하니 그런 그들의 꿋꿋함에 박수를 보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엄밀히 말하면 아직 티베트족 자치구(西藏自治区)에 온 건 아니지만, 샹그릴라는 운남성의 최북단에 있는 적경장족자치주(迪慶藏族自治州)에 속하는 현으로, 여기서 장족이란 티베트족을 말한다. 그러니까 샹그릴라부터 티베트인들이 분포하고, 샹그릴라 위쪽으로 티베트 자치구가 시작되니 여기서부터 티베트 구역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자치주이기 때문에 중국어와 티베트어가 병용된 간판이 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문자의 생김새가 인도의 공용어 중 하나인 힌디어와 상당히 닮아 있었다. 티베트는 특이하게 경전을 번역하기 위해 문자가 만들어진 나라여서 불경에 쓰인 산스크리트어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산스크리트어에서 발전한 힌디어와 유사한 형태가 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시내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고성으로 이동했는데, 지금까지 돌아본 중국의 고성과는 많이 다른 느낌이다. 아무래도 티베트와 달라이 라마가 주는 자체의 신비감과 선입견이 한몫한 듯하다. 거기다 교통편도 녹록지 않아서 외국인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그래서인지 마을 분위기도 대체로 차분했다.
이곳의 원래 지명은 중전(中甸)이었다. 하지만 제임스 힐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서 '샹그릴라'라는 지명이 히트를 치자 중국 정부에서 발 빠르게 비슷한 산세를 갖춘 곳을 찾아내어 '향격리랍(香格裏拉)'으로 개명한 것이다. 향격리랍의 중국 발음은 xīang gé lǐ lā, 즉 샹그릴라가 되는 셈. 여기 오기 전에는 샹그릴라라고 하면 뭔가 로맨틱하게 들렸는데, 저렇게 한자로 써놓고 성조를 넣어 발음해 보니 소설에서 읽었던 이상향의 느낌이 전혀 살아나지 않는다.
고성은 생각보다 좁고 단순한 구조였다. 여행자를 위한 숙소와 음식점, 기념품 가게, 라마교 스타일의 불탑 몇 개가 전부였고, 아직 입점하지 않은 빈 상가도 꽤 보였다.
마을에는 절이 2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규모가 중간 정도 되는 대불사(大佛寺)로 세계에서 제일 큰 마니차가 있는 곳이다. 성인 한 명으로는 어림도 없는 저 묵직한 황금덩어리를 만든다고 고생깨나 했겠구나 싶다. 비록 지금은 저렇게 관광객들이 와서 놀이기구 마냥 체험해보는 테마파크로 변질되었지만. 그 와중에 열심히 돌리며 만트라(진언)를 외는 주민들도 보인다. 문맹의 시절에는 저걸 돌리는 수행이라도 하게 해서 불심을 전파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제는 글로써 불경을 읽고 사고로써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언제까지 그걸 돌리고 있을 텐가...
마을 뒤에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면 백계사(白鸡寺)라는 또 다른 절이 있다. 닭 모양을 닮아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는데, 모양보다는 바람에 날리는 타르초(불경을 적어놓은 천)의 소리가 푸드덕거리는 닭소리랑 비슷해서가 아닐까 싶다. 한쪽 모서리에 앉아 언덕 아래로 펼쳐진 마을 전경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타르초가 쉴 새 없이 바람에 흩날리며 푸드덕거리는 통에 정신이 사나워져서 사색하기에 결코 좋은 장소는 아니었다.
사실 샹그릴라에 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티베트 자치구로 가려면 중국 비자와는 별개로 입장 허가서인 Tibet Permit을 받아야 하고, 남서쪽의 끝까지 가기에는 루트가 너무 꼬여버려서 여정이 복잡해질 것 같아 계획을 수정한 것이 바로
티베트 대신 샹그릴라
포탈라궁 대신 승첼링 곰파
티베트 자치구의 주도 라싸에 있는 포탈라궁과 닮아서 '리틀 포탈라'라고도 하는 승첼링 곰파(Sumtseling Gompa)의 중국 이름은 송찬림사(松赞林寺). 2가지 언어가 혼재된 자치주에서는 용어 사용이 조심스러운데, 다행히 곰파를 떼고 '승첼링' 또는 '송짠린'이라고 해도 다들 알아들었다. 고성 앞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30분쯤 걸리는 곳에 있는 이 절은 매표소에서 티켓팅을 하고, 다시 입구까지 가는 노란색 셔틀버스로 10여분을 더 들어간 후에야 겨우 절까지 오르는 108계단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달라이 라마 5세 때 포탈라궁과 함께 건립된 승첼링 곰파의 내부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그렇다고 소박한 것도 아니었지만. 어디를 가든 번쩍번쩍한 금칠은 되어 있었고, 저토록 많은 승려들이 이곳에서 지내려면 신도들로부터 쥐어짜내는 돈도 상당할 터. 그래서인지 입장료 또한 중국의 웬만한 곳보다 1.5배 정도 비쌌다.
(2020년 현재 90위안으로 내렸다고 함. 리장의 고성 입장료도 없어진 걸 보면 중국의 입장료는 대체로 인하하고 있는 듯. 원체 비싸서 내려도 내린 것 같지는 않지만.)
우리나라 절의 메인은 대웅전인 반면, 티베트 절의 본전은 '총카파 대전'이라고 한다. 총카파(宗喀巴)는 티베트 불교 중 지금의 달라이 라마 제도가 속해 있는 겔룩파를 창시한 인물이다. 참고로 티베트 불교에는 이 외에도 카규파, 사캬파, 닝마파 등 여러 지파가 있는데, 겔룩파를 제외한 나머지 종파는 승려의 결혼을 허용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겔룩파의 창시자인 총카파가 달라이 라마 1세일까? 놀랍게도 달라이 라마 제도는 그의 제자인 근돈주파(根敦珠巴)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달라이 라마 14세는 근돈주파의 영혼이 환생을 거듭하여 지금 시대에 태어났다는 이야기. 한 언론에 의하면 달라이 라마 14세는 더 이상 환생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는데, 역대 달라이 라마의 수명이 길어봐야 60년 정도인데 비해 지금 86년째 생존해 계시니 정말 이대로 달라이 라마 제도를 끝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승첼링 곰파를 나와 호숫가를 산책하다가 이끼가 잔뜩 낀 호수 아래로 비친 곰파의 모습을 보며 <잃어버린 지평선>을 생각한다. 비행기가 불시착한 곳에 나타난 동양인 승려는 과연 구세주였을까? 그를 따라가서 그들이 머물렀던 그곳의 삶은 정녕 낙원이었을까? 아무리 빠져나오려 해도 빠져나올 수 없었던 미로 같은 산속의 거기가 어찌 이상향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에게 지금의 샹그릴라가 고요하면서도 정겹게 느껴지는 이유는 시내외로의 교통편이 원활하고, 짱짱한 와이파이의 연결로 언제든지 원하는 정보를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뒷받침 없이 며칠에 한 번씩 겨우 버스가 다니거나 인터넷이 안 돼서 외부 사정을 전혀 알 수 없는 곳이었다면 이렇게 덜컥 혼자 올 생각을 쉽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내게 이상향이란 내가 하고 싶을 때 그 행위를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뒷받침이 되어주는 곳이라 하겠다. 그곳은 서점일 수도 있고, 카페일 수도 있고,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다른 어딘가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내일이 되면 당장 바뀔 수 있는 게 사람의 환경이고, 그 환경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일 테니 세상 사람들이 정한 이상향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 그 네임(name)도 내게 의미가 있어야 밸류(value)가 생기는 것이니. 내가 꽃이라고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