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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veLife May 05. 2020

서안에서 먹고 기록하고 사유하다

기차가 서안 역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물밀듯이 밀려나간다. 오랫동안 대륙의 수도이자 실크로드의 시작점이었던 서안(西安)은 과연 그 명성에 어울릴 만큼의 인파가 들끓는 유명 관광지였다. 복잡한 곳을 싫어하지만 그래도 서안은 꼭 와 봐야 했다. 어릴 적 TV에서 봤던 진시황의 무덤 속 진흙 병사들이 못내 궁금하기도 했고, 나영석 PD의 <신서유기>에 나왔던 먹방은 여행의 오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기차역을 나오는데 정면에 육중한 성벽이 보인다. 겉으로는 이렇게 고풍스러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그 안에는 옛 장안(长安)의 모습과 현대의 빌딩 숲이 혼재되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시내 중심에는 종루(钟楼)가 서울의 흥인지문처럼 장엄하게 서 있고, 그 주위로 노가(老街)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노가에서 뒷골목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매캐한 연기와 북적이는 인파로 정신이 혼미해졌다. 여기가 바로 옛날 실크로드를 오갔던 이슬람 상인들의 후예인 회족들이 모여 사는 회민가(回民街). 이곳에서 나는 지금까지 중 가장 다양한 인종과 음식과 냄새를 경험했다.

실크로드를 타고 온 아라비아 상인들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낭'부터 떡하니 반겨주니 심장이 두근반세근반이다. 갓 구워서 모락모락 나는 김을 후후 불어가며 뜯어먹으니 맛이 기똥차다. 곶감 산지로 유명한 서안에서는 특이하게도 곶감에 밀가루 옷을 입혀 튀겨내는데, 따로 간을 안 해도 곶감 자체의 당도 때문에 훌륭한 간식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양꼬치는 지금까지 먹어 본 중국 음식 중 가장 힘들었다. 언뜻 보기에는 양고기의 영롱한 분홍빛과 어마무시한 꼬치 나무가 절도 있게 보이겠지만, 이건 절대 지금까지 먹어 본 숯불고기 맛의 양꼬치가 아니었다. 씹는 순간 양고기의 노린내가 그대로 올라와서 결국 중도 포기하고 말았다.

먹거리는 회민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던한 시내를 돌아다니다 관광 구역에 없는 평범한 거리 음식을 발견하는 재미도 여행의 또 다른 매력이다. 한눈에 봐도 익숙한 비주얼을 자랑하는 회족 김밥은 비록 한국의 김밥처럼 참기름을 바르거나 다양한 속재료로 채워진 건 아니지만, 중국 스타일의 양념과 재료로 엇비슷하게 만들어서 아쉬운 대로 고향의 맛을 느낄 수 있었고, 뷔페식당에서 골라먹는 10위안(1700원)짜리 식판 밥의 퀄리티도 상당히 훌륭했다. 가만 생각해보면 저 가격에 궁보계정(닭강정), 탕초리척(탕수육), 어향가자(가지볶음) 같은 유명 중국 요리를 골라서 먹을 수 있으니 가성비로는 최고가 아닐까.


게다가 서안부터 등장하는 하미과는 멜론을 안 좋아하는 나도 중독시키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하미과뿐만 아니라 서역으로 갈수록 모든 과일의 당도가 높아지면서 맛도 월등히 좋아진다. 외지를 다니면서 맛있는 게 많아진다는 건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다.

회민가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 성벽 위를 걸어볼 수 있는 남문(南门)이 나온다. 춥고 비 내리는 날씨에 을씨년스럽게 걷기도 뭐해서 올라가진 않았는데, 여기가 바로 <몽장안(梦长安)>이라는 공연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숙소를 비롯한 거리 곳곳에 붙어 있는 화려한 포스터가 이목을 끌었지만, 당대의 귀빈 영접 의식과 실크로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는 후기를 보고 기대했던 스토리가 아니어서 건너뛰기로 했다. 좀 더 '장안의 화제'를 가미시킨 스토리텔링이 가능할 텐데, 너무 화려함과 스케일에만 집중한 건 아닌지...

남문을 통과하여 계속 내려오면 현장법사가 천축국에서 가져온 불경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대안탑(大雁塔)이 나온다. 불교 성전인 경장, 율장, 논장에 통달했다고 하여 '삼장법사'라 불리는 현장(玄奘)은 오역된 불경을 바로잡기 위해 직접 인도로 가기로 결심하는데, 문제는 그 당시 외국으로 나가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행하기 위해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장안을 넘어 건조한 사막을 지나 인도까지 가서 거의 10년 동안 불경을 연구했고, 그 후 6백여 권의 불경을 다시 장안으로 가져와서 번역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그 결과물이 고스란히 저 탑 안에 보관되어 있는 것이다.


불경 번역 못지않게 위대했던 그의 업적 하나가 더 있는데, 바로 천축국으로의 대장정을 12권의 기록으로 남긴 <대당서역기>이다. 이 책은 6~7세기 서안에서 실크로드의 일부를 거쳐 인도까지 거의 모든 문화와 지형학이 담겨 있다. 신라의 승려 혜초가 <왕오천축국전>을 쓴 시기가 8세기이고,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13세기의 일이니 여행기의 원조격인 것이다. 거기다 한 나라에서만 장장 10년을 보냈으니 그 경험의 내공 또한 얼마나 깊었을까. 그 기록의 시간이 역사가 되고 후손들의 길을 열어 갈 밑거름이 된다고 생각하니, 지금의 이 사적인 순간조차 허투루 보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그동안 인터넷에서 제공됐던 각종 플랫폼에 글을 너무 함부로 남긴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도 해본다.




서안에서 하루는 시간을 내어 외곽에 있는 진시황릉과 병마용갱을 보러 갔다. 아주 어렸을 적 TV에서 <진용>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진시황릉을 만들 당시 죄를 지은 병사에게 산 채로 진흙을 발라 무덤을 지킬 진용(秦俑)으로 만드는 장면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이 장면이 트라우마에서 애틋한 감정으로 승화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 진용을 연기한 사람이 중국 영화계의 거장 장예모 감독이고, 그의 페르소나라 할 수 있는 공리가 여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시대를 넘나드는 사랑을 펼쳤기 때문이다. 장예모 감독이 자신의 영화에서 조연을 한 적은 있었지만, 연기로만 참여하고 거기다 주연까지 꿰찬 영화는 이 영화가 유일할 것이다.

병마용갱은 이 사진 한 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13세에 황제가 되어 40세 이전에 대륙을 통일하고, 도량형과 화폐와 문자까지 통일시키고, 6400km에 이르는 거대한 도로와 수로를 만들었으며, 스스로를 황제라 칭한 진나라의 시황제. 그런 그가 유일하게 두려워한 것이 바로 죽음이었다. 죽지 않기 위해 불로초를 찾아 헤맸고, 죽어서도 자신이 지낼 지하 궁전과 자신을 지켜줄 군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도 저렇게 어마어마한 규모씩이나.

여전히 발굴 중인 2호갱의 한쪽에 마련된 전시실에서 다양한 자세와 복장과 표정의 진용들을 볼 수 있었다. 그중 영화 속 장예모가 연기한 모습은 중간의 고급 장교와 비슷했던 것 같다. 2천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 이토록 섬세하다니 그 실력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걸 만든 장인들은 어떤 마음으로 작업에 임했을까? 다른 건 몰라도 작품을 만드는 순간만큼은 초집중했을 것이고, 그 시대를 군림했던 지도자에게 절대 충성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 저런 디테일이 가당키나 할까.


영화는 환생에 환생을 거듭하는 공리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인해 계속 병마용갱을 드나들게 되고, 불로약을 먹은 덕분에 죽을 수 없는 장예모는 천년만년 살면서 사랑하는 여인을 기다리는 것으로 끝이 난다. 환생으로 인하여 리셋된 기억을 갖고 사는 자와 과거에 집착하는 자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던져준 영화. 극 중 장예모가 그토록 집착했던 이유는 결국 공리와의 사랑을 그 어느 생에서도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쉬움이 길어지면 집착이 된다. 시간은 흐르고 사회는 계속 진화발전하는데, 그대는 계속 그 자리에 머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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