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황은 있었지만 사주는 없었다.
소설 <둔황>의 저자 이노우에 야스시가 소설을 집필한 지 20년이 지난 후에야 둔황을 방문했는데 그때 했던 말이다. 여기서 사주는 둔황의 옛 지명을 말한다. 실크로드가 한창 활발했던 시절, 이 일대 사막에서 유일하게 오아시스가 있었던 둔황은 서안에서 시작되는 동쪽 루트와 중앙아시아에서 들어오는 서쪽 루트의 접경지였다. 그 지리적 이점 때문에 자연히 무역도시로 번성하게 되었는데, 모래가 많아서 사주(沙州) 또는 과일이 풍부해서 과주(瓜州)로 불렸다. 그래서 지금도 둔황에 가면 가장 큰 시장의 이름이 사주 시장이다.
이 건조하고 모래바람 부는 곳에 바로 둔황 석굴사원이 있다. 366년, '낙준'이라는 승려가 수행을 하러 가는 길에 명사산(鸣沙山)을 넘다가 상서로운 빛을 발견하고는 '부처님의 계시'라 여겨 그 자리에 석굴을 만들기 시작하는데, 그 작업이 원대까지 이어져 천 년에 걸친 대장정의 종교 프로젝트가 된 것이다. 둔황 석굴의 중국 이름은 막고굴(莫高窟)이며, 천여 개의 굴이 뚫려 있다고 해서 천불동(千佛洞)이라고도 한다.
이 천불동의 외관이 많이 익숙했던 까닭은 2002년도에 방문했던 인도의 아잔타와 엘로라 석굴사원과 많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 아잔타 석굴이 기원전 2세기부터 지어졌으니 석굴사원계의 원조라 할 수 있겠다. 인도에서 시작된 석굴사원 붐은 실크로드를 타고 중앙아시아, 중국을 거쳐 한국의 석굴암까지 전해지는데, 규모로는 둔황의 여기가 최고가 아닐까 싶다.
석굴의 대부분은 옛 수도승들의 거처 공간이고, 불상이나 회화가 있는 몇 군데만 가이드의 동행 하에 들어갈 수 있어서 영어 가이드를 신청하려고 했는데 다행히 한국어 가이드가 있다고 한다. 발음은 어눌하지만 한국어를 전공한 중국인 가이드 덕분에 지금까지 중 가장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여기서 막고굴 가이드 투어 팁을 드리자면, 질문을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솔직히 가이드라고 해도 역사를 깊이 공부한 건 아니기 때문에 대충 설명을 하고 넘어가는 부분이 많은데, 질문을 많이 하는 만큼 더 자세한 답을 얻을 수 있다.
막고굴의 하이라이트는 왼쪽의 화려한 96굴 북대불전(北大佛殿)이다. 9층의 붉은 누각으로 장식된 이 석굴 안에는 33m짜리 거대한 미륵불상이 세워져 있는데, 내부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서 사진으로 남기지는 못했지만 그다지 아쉽지는 않았다. 불상의 디테일이 지금까지 중 가장 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여기보다는 오른쪽의 허름한 16굴 안에 쪽방처럼 숨어있는 17굴 장경동이 훨씬 흥미진진했다. 소설 <둔황>의 영향도 있었지만, 그 안에서 바로 신라 승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17굴 장경동이 발견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14세기 원 제국이 멸망하면서 실크로드 무역도 점점 쇠퇴해지자 요충지였던 둔황도 자연스레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렇게 막고굴의 존재는 점점 잊혀갔고, 사원을 관리하는 사람들 외에는 나라에서조차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다 1900년에 석굴을 지키던 '왕원록'이란 사람이 청소를 하다가 16굴 입구의 오른쪽 벽에 그려진 벽화 사이로 금이 간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유심히 살펴보니 벽 뒤로 또 하나의 조그만 굴이 파여 있었는데, 그 안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고문서와 유물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17굴 '장경동의 대발견'이다.
왕원록은 이 사실을 나라에 알렸지만 서태후마저 무관심했고, 유물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몰려온 열강의 탐험가들은 왕원록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자기들이 잘 정리해서 보관해주겠다며 돈까지 건네자 순진한 왕원록은 그들을 믿고 유물을 넘긴 것이다. 이때 앞장섰던 대표적인 인물이 영국의 오렐 스타인(Aurel Stein)과 프랑스의 폴 펠리오(Paul Pelliot)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본국에서 알아주지 못한 이 유물들은 타국으로 넘겨져 아시아와 불경 연구에 이바지하였고, 오렐 스타인에 의해 둔황학(敦煌學)이라는 학문까지 탄생시켰다.
제일 오른쪽 하단에 순진하게 웃고 있는 동양인이 바로 숨겨진 17굴을 발견한 왕원록이다. 무식하도록 순진해서 열강의 탐험가들을 믿었던 죄... 그 당시 나라님도 나 몰라라 했던 순간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그것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지며 욕을 할 수 있을까.
경전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타지 않고 지금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소설 <둔황>에서 주인공 조행덕이 승려들과 함께 천불동에 경전을 숨기는 부분이 나오는데, 실제로 17굴의 유물이 어떤 경위로 보관된 것인지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프랑스에서 온 탐험가 폴 펠리오의 주장에 의하면, 당시 서하의 침략을 피하기 위해 비밀 방을 만들어서 몰래 숨겨놓은 것이라고 한다. 유물이 석굴 내에 질서 정연하게 놓여있었던 것과 그 입구를 꼼꼼하게 막은 것으로 봤을 때 꽤 일리 있는 주장이다. 이노우에 야스시도 폴 펠리오의 주장에 근거해서 저 장면을 서술했을 것이다. 그래서 17굴 장경동 안을 들여다본 순간 내가 마치 조행덕의 환생체라도 되는 것처럼 짜릿한 전율이 올라왔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과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둔황 시내의 한 건물 벽면에는 옛날 비단길 시절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 화려했던 도시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시내는 황량하기 그지없다. 석굴이 지어지는 천 년 동안에도 이렇게 고독했을까? 지금의 둔황은 막고굴의 수입으로 근근히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조상들의 은덕으로 조금이라도 전성기를 누렸을 때 이 사막 도시를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를 생각했어야 하지 않았나. 오아시스만 믿고 있다가 시대가 변하고 경제 구조가 바뀌고 난 후에 그저 방황만 하고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