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오기 전, 아주 힘든 하루를 보낸 적이 있었다. 그날 저녁 집으로 가는 길에 뭔가 위로를 받을 수 있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이 필요했고, 그게 집은 아니라야 해서 갔던 곳이 스타벅스 리저브 매장이었다. 거기서는 일반 매장에서 파는 '오늘의 커피'가 아닌, 스페셜티 원두를 다양한 기법으로 추출해낸 '고급 커피'를 팔고 있었다. 원두를 고르다가 에티오피아에서 마셨던 마키아또가 생각나서 이런저런 얘길 꺼냈는데, 커피를 내리던 바리스타가 맞장구를 쳐주면서 아주 즐겁게 대화가 이어졌던 기억이 난다.
그날 이후 나는 스타벅스란 브랜드가 새삼 궁금해졌다. 그동안 숱하게 이용해왔음에도 그날의 경험은 뭔가 특별했던 것이다. 도대체 그 분위기는 뭐지? 어떻게 카페에서 술집의 바와 같은 그윽한 분위기가 풍겨 나올 수 있었을까? 그날 마셨던 에티오피아 하일레는 비록 시큼털털했지만, 바리스타에게서 받은 영혼의 위로는 커피값을 능가하고도 남을 만큼이었다. 도대체 스타벅스란 어떤 기업이며, 그 브랜드는 또 어떻게 만들어졌길래 이런 경험이 가능한 것일까.
스타벅스의 원두가 유럽풍 커피하우스의 로맨스에 녹아든다면
미국의 커피 문화를 평범함에서 비범함으로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
하워드 슐츠가 이끌었던 스타벅스 커피 문화는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 그는 스타벅스에 합류한 이듬해인 1983년, 출장을 갔던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처음으로 에스프레소 바를 경험하고는 그들의 카페 문화에 매료된다. 당시 시애틀의 스타벅스 매장은 원두만 팔고 좌석이 없는 소매상의 형태인데 비해, 밀라노에서는 숙련된 장인들이 에스프레소를 뽑아 카푸치노를 만드는 와중에도 바에 앉은 손님들과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시애틀로 돌아온 하워드 슐츠는 유럽의 매장 문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했지만, 원두와 로스팅 자체에 집중했던 스타벅스의 창립 멤버들은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스타벅스를 떠나 시카고에서 '일 지오날레(il Giornale)'라는 에스프레소 바를 오픈했다. 그의 예측대로 매장 문화는 대박을 쳤고, 2년 후인 1987년에 드디어 스타벅스를 인수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커피계의 전설, '스타벅스'라는 브랜드가 탄생된 역사적인 스토리이다.
세계 최초의 스타벅스 매장이 있다는 시애틀의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Pike Place Market)은 비가 오나 해가 쨍쨍하나 바람이 부나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시장 앞으로는 시애틀 항구 중 가장 경관이 뛰어나다는 퓨젯 사운드(Puget Sound)가 펼쳐져 있어 건물 안에서든 밖에서든 멋진 뷰를 감상할 수 있으며, Ghost Alley나 Post Alley 같은 개성 강한 골목도 숨어 있어서 깨알 같은 재미를 선사한다. 시장 안을 돌고 돌아 겨우 빠져나오는데 저 앞에서 익숙한 간판이 보인다. 바로 스타벅스 1호점이다.
초창기 간판이 그대로 걸려 있는 1호점의 입구에는 글로벌 브랜드의 명성에 걸맞게 기나긴 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참고로 원조 1호점은 한 골목쯤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1976년에 여기로 이전했다고 한다.) 긴 대기줄을 겨우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가니 듣던 대로 앉아서 음료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전혀 없는 예전의 원두 가게 모습 그대로였다. 계산대에서 다시 한번 줄을 서 있는데, 기다리는 동안 지루하지 않도록 MD(merchandise) 메뉴판을 건네준다. 스타벅스의 원조집에 왔으니 기념으로 뭔가 하나는 챙겨가야 할 것 같아서 스테인리스 재질의 텀블러를 구매하기로 했다.
주문을 하면 상품은 먼저 종이백에 담아주고, 음료는 안쪽 픽업대에서 호명하면 받아가는 시스템인데, 개인적으로는 이름을 적어주고 불러주는 스타벅스의 'call my name' 서비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외국인인 내 이름을 단 한 번도 제대로 써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Yubeen'이라는 몇 안 되는 철자의 나열에도 불구하고 순서를 바꾸거나 몇 번씩 겹쳐 쓰기도 해서 전혀 다른 이름이 나오기 일쑤였는데, 그중 제일 이상했던 건 동아프리카의 스와힐리어와도 같은 '우뷰빔(ubyubeem)'. 듣는 순간 내 이름인 줄 알면서도 부끄러워서 차마 음료 픽업대 앞으로 갈 수 없었던 웃픈 기억이 난다.
스타벅스에만 있는 줄 알았던 이 서비스는 다른 브랜드의 카페도 마찬가지였고, 심지어 맨해튼의 쉑쉑버거 본점에서도 아날로그하게 이름을 불러서 결국 심플한 영어 이름을 따로 지어 사용했다. 하지만 마지막인 시애틀에서, 그것도 스타벅스 원조집에서만큼은 본명을 쓰고 싶었는데, 지금까지 중 가장 정확하게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아닌가! 철자까지 완벽했다. 수염이 산타클로스만큼이나 풍성한 남자 직원이 음료를 건네며 한마디 덧붙였다. 오늘처럼 해가 쨍쨍한 날은 시애틀에서 드물 테니 꼭 퓨젯 사운드가 보이는 갑판에서 커피를 마셔보라고. 순간 예전에 리저브 매장에서 경험했던 그 인간적인 대화가 떠올랐다. 이 정신없는 시장바닥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경험, 이것이 바로 스타벅스의 커피 문화가 아닐까.
직원의 추천대로 갑판으로 나갔더니 눈 앞에 환상적인 뷰가 펼쳐진다. 몇 날 며칠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통에 거의 미술관, 도서관만 전전했었는데, 이렇게 확 트인 바닷가에서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으려니 지금 이 시간이 한없이 소중해진다. 비록 한마디 짧은 팁이었지만, 스타벅스 1호점의 직원이 건네준 친절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앞으로 나 있는 Pike Street를 따라 걷다 보면 스타벅스 리저브 로스터리 1호점이 나온다. 리저브(Reserve)는 '가장 좋은 곳에서 재배된 것'이란 뜻으로, 단일 원산지에서 극소량만 재배된 고급 원두를 사용하여 클로버, 케멕스, 사이폰 등 다양한 추출 기법으로 제조한 커피 메뉴를 제공하는 곳이다. 거기다 로스터리까지 더해졌으니 커피콩을 볶는 작업도 한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스타벅스 리저브 로스터리의 상징은 뭐니 뭐니 해도 로즈골드 빛깔의 거대한 Copper Cask일 것이다. 이 구리 통에 로스팅된 원두가 보관되며, 천장으로 연결된 튜브를 통해 바리스타들이 대기하고 있는 메인바로 전달된다. 로스터리 공간 다음으로 눈길을 끄는 것은 지금까지 중 가장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는 MD 코너이다. 커피 관련 제품은 기본이고, 리저브 매장에서 사용하는 추출 기구와 와인잔, 각종 생활용품까지 판매하고 있어서 마치 백화점을 방불케 한다.
매장의 양쪽 끝에는 Mixology Bar와 Experience Bar라고 해서 술이 혼합된 메뉴나 아예 술 자체를 제공하는 공간도 있다. 이쯤 되면 정말 커피계의 한 획을 그었다고 인정할 만한 변신이다. 참고로 리저브 매장은 선대 회장인 하워드 슐츠가 2000년에 CEO직에서 물러났다가 매출이 계속 떨어지자 2008년에 복귀하여 2014년에 새롭게 론칭한 브랜드이다.
스타벅스라는 브랜드의 가치는 경험을 통해 구축되고,
경험은 직원들이 고객과 맺는 관계 속에서 매일 되살아난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는 경영 방식'을 모토로 달려온 스타벅스의 경험이 어느새 평범하다는 평가를 받기 시작하자 '본질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 하워드 슐츠. 그가 내린 특단의 조치는 바로 전 매장의 문을 닫는 것이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품의 품질과 직원들의 교육을 재점검하겠다는 뜻에서다. 세상의 기업인 중 하워드 슐츠처럼 본질로 돌아갈 용기가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런 그의 도전 정신이 있었기에 브랜드 면에서는 의심의 여지없이 1위를 유지하고 있는 있는 것 같다.
사실 스타벅스의 커피 맛은 평범하다. 본사가 있는 미국에서 로스팅을 한 후에 각 지점으로 보내기 때문에 원두의 신선도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아마 맛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할 테지만, 스타벅스는 결코 맛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다. 집과 직장이 아닌 제3의 '공간이 만들어낸 문화', '문화가 만들어낸 공간'을 경험하러 가는 것이다. 그 경험 문화를 스타벅스가 최초로 대중화시켰고, 다양한 변화를 시도함으로써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해낸 공로는 인정해줘야 하지 않을까.
비틀스가 재창조의 기술에 대해 우리에게 던져준 메시지가 있다.
그들은 음악에 충실하면서도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창조했다.
아이콘은 시대의 불안을 이해하고 희망을 제시하며 혼란에 빠진 문화를 바로잡는다.
- 하워드 슐츠의 <온워드>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