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팬텀' [공연]
1.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인간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스통 르루의 <오페라의 유령>을 원작으로 둔,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고 자신의 모습을 숨기는 '팬텀' 캐릭터는 어린 시절 나에게 이입이 많이 됐던 캐릭터였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대학생 때 프랑스로 교환학생을 간 김에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가르니에 극장에 직접 다녀왔었던 적이 있어 그 공간이 주는 현장감을 직접 느껴봤던 적이 있다.
그리고 나머지 이유는 팬텀의 고통에 더 이입이 되는 이유기도 한데, 그것은 바로 어린 시절 갑자기 여드름이 심하게 나면서 피부가 많이 나빠졌던 것과 관련된다. 가장 잘 보이는 곳에 흉이 지고 잡티가 생기다 보니, 주위 사람들은 나만 보면 내 피부에만 주의를 기울이기도 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들 중에 나를 진심으로 걱정했던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지만, 대부분은 보기 불편한 나의 얼굴 상태에 호기심이 생겨서 던지곤 하는 무례한 질문들이 대다수였다. 그때마다 내 피부는 왜 나쁜가하며 나의 처지를 비관하기도 했다.
여기서, 뮤지컬 '팬텀'에서는 동명의 뮤지컬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팬텀, 즉 에릭(이제부터 팬텀을 에릭으로 부르고자 한다)의 어린 시절이 (소설의 내용과 견주어 봤을 때 내용상 약간의 변형이 가해진 채) 극에서 상세하게 설명되고 있다. 그의 얼굴은 그 가면을 벗은 얼굴을 잠시 쳐다보기만 한 그 누구라도 경악할 만큼 '추'한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그는 발레리나이자 뛰어난 가수이기도 했던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받은 듯, 오페라 극장 지하에서 살 수밖에 없는 자신의 비극적인 삶이 고통뿐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뛰어난 음악적 재능으로 승화시켜내기도 한다.
이 극을 관람하면서 가장 마음이 아리게 다가왔던 지점은, 에릭은 자신이 사랑받지 못할 존재라는 점을 스스로가 뼈저리게 알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사랑받지 못할 것을 알기에 사랑하는 상대에게 차마 그 마음을 표현하지도 못하는 그런 그의 아픔이 극 중에서 가장 미학적으로 잘 표현되었다고 생각한 부분은 다음의 장면이었다. 즉, 에릭의 지도에 따라 비스트로에서 성악적 기량을 마음껏 펼친 크리스틴이 라울과 거리 데이트를 하게 되는데,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샹동 백작의 노래 선율을 그저 뒤에서 바라보기만 할 뿐 계속 그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슬퍼하는 에릭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에릭은 이후 자신의 얼굴을 보고 도망간 크리스틴으로부터 크게 좌절하여, 왜곡된 사랑의 형태를 보이기도 한다. 또, 그가 보이는 사랑의 모습은 서투르기도 하다. 더군다나 그는 자신이 사랑받지 못할 존재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자신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샹동 백작이 크리스틴에게 불렀던 세레나데의 선율에 자신의 마음을 실어 크리스틴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미약하게나마 드러낼 뿐이다. 그러나 에릭은 그녀에게 구원받기 위해서 자기 삶의 이유를 찾았다고 말할 정도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
에릭이 이런 자신의 비극적인 삶에 괴로워할 때마다 위로가 되어 주었던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아름다운 음악'이다. 그는 빛 하나 들지 않는 오페라 극장 지하에 살면서, 음악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찾길 평생 바라왔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크리스틴의 노래를 듣게 되면서 그녀에게 자신도 모르게 다가가게 되고, 그녀에게 성악 교습을 하게 되면서 점차 사랑을 키워 나가게 된다.
음악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그래서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 누군들 그에게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추한 모습에 그저 극장 뒤편 어딘가에서 바라만 보며 그녀를 사랑할 뿐인 그의 모습이 인간적으로 너무나도 가여웠다. 작가 아서 코핏이 이 팬텀을 그려냄으로써 표현해고자 했던 것처럼, 그는 멀게만 느껴지는 '괴물'이 아니라, 그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었을 뿐인 한 인간으로 묘사되고 있었다.
2. 뮤지컬 '팬텀'의 전개 방식: 마치 푸가(fuga) 형식과 같이,
전(前) 극장감독 제라드의 말마따나, 한때 오페라가 크게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현대의 오페라 버전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뮤지컬이라고 생각한다. 음악과 연극적 요소 그리고 안무 등등의 다양한 예술들로 구성된 종합 예술이라는 점에서 둘은 유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뮤지컬은 그 둘 사이의 경계를 줄타기하듯 오고 간다. 즉, 이 극을 보는 관객은 뮤지컬을 보고 있지만 마치 오페라 공연, 혹은 발레 공연을 보는 듯한 그런 복합적인 연출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뮤지컬이 아이다, 라 트리비아타 그리고 한여름 밤의 꿈 등의 여러 오페라 속 장면이 극 중 고조되는 긴장감을 위해 극중극 형식으로 등장한다는 점에 근거한다.
극 중에 '팬텀의 푸가 파트'라는 곡이 있다. 이 부분을 공연장에서 직접 귀로 들으면서 문득 든 생각이 있다. 그것은 그 곡의 이름에서처럼, 이 극 역시 '푸가' 형식으로 전개되는 것 같다는 것이다. 여기서 푸가(fuga) 형식이란, 하나의 선율을 한 성부가 연주한 뒤 뒤이어 다른 성부에서 그 선율을 다른 음역에서 모방하여 연주하는, 일종의 돌림노래 형식이다. 그런데 한 성부에서 연주된 선율을 다른 성부에서 동일한 음역으로 연주해버린다면 그것은 그저 같은 멜로디를 반복할 뿐이기에, 여기서 '차이가 계속 발생하는 모방'이라는 역설적인 특징이 푸가 형식에서 주목해볼 만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차이가 계속 발생하면서 생겨나는 모방'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부분은 곡 이름 그대로 '팬텀의 푸가 파트'가 공연되는 지점이었다. 이 곡에서 에릭은 오페라극장 어딘가에서 크리스틴을 위한 성악 교습을 해주고 있다. 크리스틴은 처음엔 노래 부르는 것이 어색한 듯 하나, 이내 그의 지도를 따라 노래를 잘 부르게 된다. 그런데 이때, 교습이 이루어지는 무대 장치가 뒤로 빠지자마자, 오페라극장 내부에서 디바 카를로타가 주인공을 맡은 여러 오페라가 상연되는 장면으로 전환된다.
그런데 욕심이 많으나 실력은 없는 카를로타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에릭은 각각의 오페라가 시작된 후에 각각의 트릭을 걸어 그 공연들을 망치게 만든다. 푸가 파트에서 교습 장면(무대 장치)과 오페라 공연 장면(무대 장치)가 계속 반복적으로 왔다 갔다 상호 교차 배치되는 모습은 여러 번 반복된다. 이때 푸가 파트가 1에서 2로 가는 동안, 팬텀이 가르치는 각각의 선율은 비슷하지만 차이를 발생시키며 전개된다. 이때 오페라 역시 공연된다는 점에서 반복되나 오페라극장에 깃든 긴장감은 한껏 고조되기에 이른다. 평화로울 것 같은 오페라극장에서 미스테리한 일이 계속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극중극 연출을 나는 좋아하는 편이다. 겹겹이 쌓인 '극 중의 극'은 자신의 모습을 숨기지만, 외면의 모습에 꽁꽁 쌓여 잘 보이지 않는 그의 마음 내부에는 자신의 모습 있는 그대로 사랑 받고 싶어하는 어리고 순수한 에릭의 내면을 복합적으로 보여주는 효과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 글의 제목은 극 중 마지막 곡인 '넌 내 아들'에서, 에릭이 자신의 아버지와 마지막 이별 인사를 나누며 자신의 삶을 초연하게 읊는 장면의 가사가 에릭, 그리고 팬텀의 삶을 가장 잘 표현해내주고 있는 것 같아 가져온 것이다. 비록 그는 자신의 삶이 비극으로 끝나긴 하지만, 자신이 느꼈던 세상의 어둠과 아픔들을 음악을 통해 슬프지만 아름답게 표현해냈기 때문이다.
3. 극이 끝나도 계속되는 여운
뮤지컬 '팬텀'의 노래들을 대부분 좋아하지만, 2막이 시작된 후 바로 나오는 '그대의 음악이 없다면'이라는 곡을 특히나 좋아한다. 그 노래를 듣는 순간, 약간 습하지만 잔잔한 밤의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뮤지컬을 2016년에 처음 접했다. 처음 노래를 들었을 때 생겼던 마음의 울림이 10년 동안 내 마음 속 어딘가에 깊이 잠재워져 있다가 10년 가까이 되어 다시 보게 된 '팬텀 10주년 공연'에게서 그 울림을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울림을 여러분들도 경험하실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