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과 기억의 거울

극장의 시간들 [영화]

by 윱인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홀연 듯 다른 세계에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도대체 '보는 것'이 뭐길래 우리는 시간과 돈을 들여 극장에 가는 것일까?


사실 난 영화를 여러 문화예술 장르 중 가장 좋아한다라고는 말 못하겠다. 내가 다른 장르에 대한 진득한 덕후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무실 동료와 나누었던,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 동료가 나에게 물었다. "그럼 선생님은 좋아하는 영화가 있긴 해요?" 그 물음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있죠. 하지만 사실 음악이 (상대적으로) 적은 영화가 이젠 점점 단조롭게 느껴져요." 그 대답에 내 애호의 외연이 너무 좁은 거 아니냐며 경악을 금치 못했던 동료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렇기에 내가 바라보는 시선은 영화를 최애 장르로 둔 사람처럼 섬세한 시각은 가지지 못할 지라도, 한 관객의 평범하디 평범한 하나의 단상은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이 영화에선 세 편의 단편영화가 상영되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는 영화 각각에 대한 감상보다는 세 편의 단편영화가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되는 전체적인 이미지에 대한 감상이 떠올랐던 것 같다.


영화는 나에게 항상 도전과제였다. 20대 때 독립영화를 좋아했던 대학 동기들 덕분에 여러 독립영화제에도 가서 영화를 보기도 했고, 독립영화 동아리를 창설하기까지 해서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했던 나의 동기들 덕분에 독립영화를 생각보다 볼 기회가 내게 많이 있었다. 그러나 영화를 본 나의 소감은 '음악 없는 적막감이 민망함'이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엔 대부분의 상업 영화나 다른 음악 장르처럼 음악이 주가 되어 삶 속에 깔려 있지는 않다는 걸 고려한다면, 사실 객관적으로 생각해봤을 때는 영화야말로 인간의 삶을 지극히 고스란히 반영해내는 장르일 것임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독립영화를 볼 때 이따금 등장하는 은은한 배경 음악이 깔려 있는 양상이 오히려 우리네의 삶과 더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점에서, 영화라는 장르가 내게 주는 귀중한 가치는 그것을 통해 복원되는 기억과 추억의 이미지들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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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영화 <침팬지>를 보며, 나는 대학생 시절 영화광이었던 대학 동기들과 영화 감상 후 수없이 나누었던 수다에 대한 단상이 떠올랐다. (떠올리고 보니 영화를 덜 좋아한다고 말해 놓은 것 치곤 영화를 꽤 많이 봤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가 수없이 나눈 그 대화들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지만, 아마 그때 웃고 떠들다가도 다른 한편으론 진지하게 토론까지 하던 우리의 대화록을 다 모아서 기록해놓았더라면, 어쩌면 그럴 듯한 하나의 평론집이 나올 지도 모른다는 대담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얘들은 왜 독립영화를 좋아할까?' 이해하긴 어려웠어도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내는 게 즐거웠기에 그들이 좋아하는 영화를 참 많이도 보았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그 추억과 기억들이 내 마음속에 저장되어 지금의 나를 있게 한다. 마치 고도, 모모, 제제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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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영화 <자연스럽게>에서 어린이 배우들이 어린이다움을 '자연스럽게' 연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면서는, 몇 주 전 명절에 부모님 집에 가서 우연히 발견한 내 9살 생일 파티 사진이 떠올랐다. 어렸을 땐 햄버거 가게나 집에서 음식을 차려서 친구들을 초대하는 게 일종의 트렌드였다. 그때 사진을 찍고 있는 줄도 모르는 아이들이 각자 맛있어보이는 음식에, 혹은 각자 관심있는 피사체에 눈을 떼고 있지 못하는 그 모습이 참 천진난만하다고 생각했다.


영화 중간에 아이들이 쉬는 시간에 핸드폰을 보며 마라탕을 먹는 적막이 흐르는 장면이 웃겼는데, 아마 내가 9살이었을 적 마라탕이 흔했더라면 내 생일파티의 메뉴 중 하나에 마라탕이 들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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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영화 <영화의 시간>에서는 내 고등학교 친구 한 명이 떠올랐다. '사부작거린다'라는 단어가 생각날 정도로 그 친구와는 참 수다를 많이 떨었었는데, 스무 살이 되고 생활 반경이 달라진 이후 연락이 자연스레 끊겼다가 얼마 전에 다시 연락을 하게 되었다. 이제 각자 직장이 생긴 우리는 점점 만나기가 힘들어지겠지만, 그래도 이번 휴가 때엔 꼭 보기로 약속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0년 동안 그녀는 얼마나 바뀌어 있고 또 어떤 면에서는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인 모습일지 궁금하다. 나의 20대를 보낸 정동과 광화문에 그녀와 잠시 함께 보낼 짧은 시간은 또 얼마나 수다스럽고 재미있을지 기대가 된다.



영화의 시간들은 지금의 내 한 부분을 차지해왔고, 그것으로 인해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그렇기에 영화는 추억과 기억의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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