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센티아 Oct 06. 2020

업보는 나의 힘

어지럽히는 엄마 슬하에 치우는 딸로 산다는 건


해야 할 일들이 손에 안 잡히거나 왠지 심란한 마음이 들 때, 지금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맞는 건지 어떤 건지 갑자기 혼란스러운 기분일 때, 나는 정리를 한다.




일단 정리를 하기로 마음을 먹고 나면, 정말이지 대대적으로 집을 뒤집어 놓는다. 이것은 나의 아주 오랜 습관인지라, 그 시작이 언제부터였는지 조차 아득하다. 굳이 추적해보자면, 아마도 중학생 때까지는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나와는 정반대로 엄마는 도통 정리를 할 줄 모르는 분이셨다. 내가 기억하는 내 인생 전부를 통틀어 친정집이 말끔히 정리되어 있는 모습을 나는 보지 못했다. 때문에 지금은 일흔이 가까워 오는 엄마의 집에 놀러 가면, 나는 눈에 거슬리는 것들이 많아 참으로 마음이 심란해진다. 어차피 스물이 조금 넘자 바로 집에서 나와 살며, 엄마의 집 정리에 대해서는 포기하고 체념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언제나 물건으로 가득 쌓여 앉을 곳도 없는 친정 집에 대해, 그리고 엄마에 대해, 내 마음속에는 도저히 친밀감을 가질 수 없는 큰 벽이 만들어졌다.


엄마가 물건을 정리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곳에 너저분하게 쌓아놓고 사는 것에 대해 나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와는 정반대로 나라는 사람은, 물건이 제자리에 정돈되어 있지 않으면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쓰던 물건들은 항상 있던 곳에 놓아야 직성이 풀렸고, 되도록이면 미니멀한 느낌이 들도록 모든 것을 보이지 않게 서랍이나 수납장에 정리해야만 했다. 그런 내게 나와는 성향이 정반대인 엄마의 살림살이들은 보고만 있어도 두통을 일으켰다.


도대체 왜 물건을 정리하지 않는 것이냐고... 

수십 번도 넘게 따져 묻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물건은 많은데 집이 작아서..."라는 거였다. 확실히 네 식구가 살기에 집이 좁긴 했다. 하지만 나는 그게 얼마나 궁색한 변명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엄마 같은 습관을 가진 이에게는 40평이나 60평에 산다 해도 공간은 항시 부족할 것이었다. 좁은 원룸에서 자취를 할 때에도 내 방은 항상 정리되어 있었고 깔끔했다. 결국 정리는 평수의 문제가 아니라, 정리 습관과 공간에 대한 태도의 문제임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따금씩 TV를 보다 보면 쓰레기장 같은 집으로 이웃에 민폐를 끼쳐 화제가 되는 인물들이 나왔다. 대부분 오래된 재개발 단독주택 같은 곳에 살며, 집 안팎에 쓰지도 않는 각종 잡동사니나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쓰레기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물건들을 한가득 쌓아놓고 사는 모습이었다. 그런 내용을 담은 프로그램의 타이틀은 이를테면 '세상에 이런 일이?'라고 붙을 정도로 시청자들로 하여금 경악을 자아내는 것이었다. 방송에서는 그런 성향에 대한 심리전문가들의 진단이 뒤따르곤 했고, 결론은 그것이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떠한 장애나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부질없는 기대지만 엄마도 세러피나 정신상 담을 꼭 한번 받아봤으면... 하는 생각을 혼자 해보곤 했다.


사실 일평생 아파트에 거주해온 엄마가 TV에 나오는 그런 심각한 지경인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내가 결벽 쪽에 보다 가까운 예민한 성격이다보니, 엄마 정도의 상태조차 그런 부류나 다름없을 정도로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것뿐이다. 하지만 확실히 누군가가 친정집에 놀러라도 온다면, 집안이 너저분하게 정리가 잘 안되어있다는 느낌을 공통적으로 받기는 하리라. 거기에는 적어도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 정도의 너저분함은, 혼자 사는 남자라거나 사춘기 청소년의 방, 그도 아니면 작업에 몰두하느라 제멋대로 도구를 쌓아둔 예술가의 화실에나 어울릴 이미지이다. 그런데 그런 느낌이 드는 친정집이라면, 글쎄, 결코 누구도 원치 않을 것이다. 예부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결혼한 여자에게 친정이란, 정신적, 물리적 도피처이자 위안과 평안을 기대하며 가는 곳이 아니던가! 하지만 나에게 친정은 어쩌다 발을 붙였다가는 온갖 정리되지 않은 물건으로 정신이 사나워져, 없던 스트레스도 생기는 장소였다. 아무리 나를 환대해주고 따순 밥을 지어 상 다리가 부러져도 나는 친정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 사실이 여지껏 사는 동안 내 마음을 한없이 춥고도 정처 없이 떠돌게 했다.


살다가 지치거나 힘들 때, 외롭거나 초라한 기분이 들 때, 부모님의 집으로 가면 포근함과 안위를 느끼는가? 

운이 없게도 나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집으로 갈 일이 생기지 않기 위해 더욱 발버둥 치며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외로워지면 안 돼. 병들면 안 돼. 슬프거나 힘들어지면 안 돼! 그렇게 되어 도저히 발 붙일 곳이 없어지면, 나는 결국 '그곳'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지 모르니까.


© TheDigitalArtist, 출처 Pixabay


부모님을 일찍 여의어 돌아갈 친정이 없는 이들에게는 이조차 배부른 하소연이라 할지 모르겠다. 그래, 그런 이들에게는 그렇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너무도 뿌리 깊은 어린 시절부터의 트라우마였던 것일까? 


"보통은 엄마가 열심히 정리를 해대고, 아이는 어지럽히는 게 정상 아냐? 어째서 우리 집은 반대인 거냐고?!"

한때는 울컥하는 마음에 대들며 따지고 싶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항상 집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것은 나였다. 부모님은 일을 하러 항상 밖에 나가계셨다. 먹고 살기 급급한 부모님에게 눈뜨면 나가 밤에 들어오는 집안의 정리란 어차피 안중에도 없는 이슈였다. 둔감한 남동생도 어지러져있는 집이 그다지 불편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결국 체념한 채, 집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던 나는 어질러진 집안을 혼자서 묵묵히 치우고 있었다. 어차피 오늘 치워놔도 내일이면 다 어질러지는 집구석이었지만.


식구들은 어지르고, 나는 치우고...

돌아오면 옷을 벗어 휙 아무 데나 집어던지는 그 모습. 나는 식구들의 그 모습이 너무도 싫었다. 특히 엄마는 자주 쓰는 물건을 눈에 잘 띄게 둔다는 핑계로 서랍에 수납하지 않고 항상 거실 바닥에 그냥 두었다. 매번 그러다 보니 거실 벽 사방이 물건으로 둘러싸였고, 그 한가운데서 생활을 하는 격이었다. 


아빠나 남동생보다 엄마야 말로 그런 경향이 심했던 것에 나는 유독 분노를 느꼈던 것 같다. 페미니스트들이라면 왜 엄마에게만 살림의 부담을 물으려하냐고 공격할지 모른다. 가끔 친구들 집에 놀러 가보면 깔끔하게 정리된 성실한 주부의 살림의 손길이 전해졌다. 우리 엄마는 일을 하니까 당연히 전업주부들처럼 살림에 신경을 쓸 여유는 없었으리라... 그렇게 정당화하며 그 시절들을 해석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일을 하지 않는 노년기에 와서도 어차피 친정집은 예전과 하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그저 우리 엄마는 정리를 하는 습관이 들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살아도 본인은 하등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을 뿐이었다. 다만 그와는 정반대 성향인 환경에 민감한 나 혼자서만 그 모든 업보를 고스라니 지고 자라야 했던 것이다. 결국 어느 순간부터 나는 방문을 걸어잠그고 내 공간만 정리했다. 온 집안이 시궁창같다 할지라도, 내가 누워자는 그 작은 공간만은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있었다. 집에 있을때 나는 항상 시야를 차단하기 위해 문을 굳게 닫았다.


© newhouse, 출처 Pixabay


이제는 독립한 지 어언 20여 년이 다 되어간다. 결혼을 해서 어엿한 내 가정이 있고, 수시로 깎아놓은 밤처럼 집안을 정리한다. 인테리어나 데코에 관심이 많은 나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집안의 소품과 패브릭을 계절감 나는 컬러톤으로 바꾸고 장식한다. 다행히 남편도 나와 비슷하게 깔끔하고 정리를 잘하는 성향이어서, 어린 시절 너저분하고 정리가 안 돼있던 공간의 악몽으로부터 이제는 영원히 해방된 듯하였다. 


그런데 이게 웬걸! 하나뿐인 아들이 친정 엄마의 성향을 '고대로'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아직 일곱 살 밖에 안되었지만, 옷을 벗어 아무 데다 던져두는 '고 모습', 온갖 장난감을 온 방에 짝 펼치고 절대 치우지 못하도록 하는 '고 모습'에서 나는 절망적인 데자뷔를 경험한다. 이 무턱대고 어지르고 아무 데나 물건을 두는 몸짓과 습관은 분명 어딘가에서 본 기억이 있다. 바로 친정 엄마에게서.


아직 어려서 그런 것뿐이라고 생각하려 해도, 분명 그 행동에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강한 경향성과 기질이 엿보인다. 물건을 수납하거나 정리해두면 오히려 불편하다고 믿는 아들에게는 나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신념 같은 것이 있는 듯하다. 우리 엄마도 딱 그랬다!

"이렇게 정리가 안 돼 있으면 물건 찾을 때 불편하지도 않아? "

내가 이렇게 물을 때마다, 엄마는 태연하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다 찾을 수 있으니 아무 걱정마라!"


여지껏 살며 내가 만났던 정리를 안 하고 사는 이들은 모두 이런 공통된 특성을 보였다. 물건이 제멋대로 어지럽혀진 듯 보여도 다 자기만의 시스템이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정작 필요할 때 재빨리 물건을 찾아내는 모습을 나는 보지 못했다. 서랍이나 상자에 꼼꼼하게 라벨링까지 해서 정리해두는 내게는 어떤 물건을 필요할 때 찾는 것은 일도 아니다. 항상 제자리에 물건을 두니, 보기에도 깔끔한 것은 물론이요, 어떤 물건이든 효율적으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정리를 하지 않는 산만한 이들일수록 그런 정리의 중요성을 폄하하거나 경시하곤 한다. 그냥 시간을 들여 찾으면 되는 거니 문제 될 거 없다고 말하면 어쩔 도리야 없지만, 미관상 보기 싫은 것은 또 어찌할 것인가? 어쩜 그렇게 흐트러진 환경에서도 초연할 수 있는 것인지, 도리어 나도 그들의 그 둔감함과 쿨함(?)이 부럽기까지 하다.


어차피 그런 습관이나 성향은 남이 어떻게 고쳐줄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나는 평생에 걸쳐 여실히 깨달아왔다. 일흔이 되도록 변하지 않는 엄마가 계신데 말 다 한 것이지 무엇이랴. 스스로가 정리의 효용이나 중요성을 자각하거나 민감해지지 않는 한, 어차피 남이 종용해서 될 일이 아닌 것이다. 다만, 엄마는 어쩔 수 없다 쳐도 우리 아들은 어찌해야 할까? 아직도 십수 년을 한 집에서 같이 살아야 하는데, 행여라도 아들이 엄마와 비슷한 성향이라면, 영영 끝났다고 믿었던 예전의 정신적 스트레스가 또다시 펼쳐질 판인 것이다. 아직 일곱 살이면 분명 고쳐지거나 나아질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사람이란 좀처럼 변하지 않지만, 아직 아주 어린아이에게는 항상 희망이 있는 법이다. 그래, 아직까지는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다.


믿음을 가지고 잔소리도 해보고, 정리 안 된 방을 대신 치워주지 않고 방치도 해보았다. 제발 좀 스스로 너저분하고 지저분한 환경에 불쾌감을 느끼고 정리를 해야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기를 간절히 염원해서다. 만일 어느 정도 노력해봐도 바뀌지 않는 다면 엄마에게 그랬듯, 아들에 대해서도 정리에 대한 기대는 단념을 해야 할 테다. 그러면 20년 전에 일단락되었다고 믿었던 그 악몽이 다시 시작된다는 얘기다. 이것이 정녕 나의 업보인 것일까? 신은 어째서 내게 이토록 기가 막힌 모순을 떠안겨준단 말인가?


한때는 참으로 신경질이 나고 원망스러웠던 것 같다. 나도 그냥 정리벽이 없고, 너저분하던 말던 둔감한 사람이었다면 차라리 편하지 않았을까? 집안은 더욱 쓰레기장이 되었을 망정, 스트레스를 받는다거나 혼자 정리하며 억울해하는 일 따위는 없었을 텐데. 그랬다면 엄마를 완전히 이해하다 못해 같이 집안을 어지럽히는데 동참하며, 모녀 사이에 왠지 모를 이 보이지 않는 벽도 애당초 없지 않았으려나.


지금도 나는 아이가 유치원에 가면, 아이 방 문 만 살포시 닫아 놓는다. 흩뜨려져 정신 사나운 그 풍경을 내 시야에서 잠시나마 차단시키기 위해서이다. 아이 방의 정리는 어차피 해도 해도 끝도 없을뿐더러, 엄마가 마음대로 물건을 치웠다며 하도 신경질을 부리는 탓에, 언젠가부터 그냥 방치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이 공간만 쏙 빼면 집안은 항상 말끔히 정리되어 있다.


그래, 지금은 그냥 이것으로 되었다. 아들의 방은 어차피 앞으로도 점점 엄마에게는 성역의 공간이 되지 않겠는가? 쓰레기장이 되던 말던 그 공간만은 내 의식에서 따로 떼어 몰아두기로 한다. 언젠가 그 공포의 문에서 좀비가 나타나거나 외계인이 출몰한다 해도 나는 절대 열어보지 않으리!


© behy_studio, 출처 Unsplash


오늘따라 문득 가을이라는 계절감이 물씬 느껴지고, 머리도 조금 복잡하였기에 나는 대청소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싱크대를 다 들어내 정리하고, 드레스룸도 온통 가을 옷으로 다 바꾸어 걸었다. 청소기로 온 집안을 다 돌리니 어느덧 내 마음까지 싹 정리가 된 산뜻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단 한 곳, 바로 그 성스러운 곳(?)에 만큼은 일절 발을 들이지 않았다. 굳게 문 닫힌 바로 그 금기의 공간인, 아들 방! 물건을 정리한다는 것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카타르시스와 희열을 주는지, 마음까지 정화되고 정돈되는지, 이런 효용과 가치를 우리 엄마나 아들도 과연 공감할 날이 있을까?




평생 지고 가야 할 내 업보를 씻어내기 위해 오늘도 나는 열심히 집안을 정리했다고 생각한다. 어찌 되었건 적어도 내 머릿속과 우리 집은 차곡차곡 말끔히 정리가 된 듯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