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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센티아 Oct 23. 2020

바다에 간 이야기

느림보 바다거북의 고백

나는 드넓은 바다를 향해 떠나려고 마음먹은 모래 위의 느림보 거북이다.


나를 낳은 바다거북 엄마는 저 시퍼런 대양으로부터 헤엄쳐 나와, 이 모래 무더기 위에 우리 거북 알들을 낳고 떠났다고 한다. 겨우겨우 힘겹게 껍질을 깨고 나와보니, 사방을 둘러보아도 우리 어린 거북들을 바다까지 인도해 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다른 거북보다 유독 느리고 다리가 짧았다. 다른 형제 거북들은 껍질을 벗자마자 발 빠르게 바다를 향해 해변을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보다 훨씬 빠를 뿐 아니라, 무얼 하면 될지 분명히 알고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겁이 많은 나는 등껍질 속으로 얼굴을 한껏 들이 민 채, 도무지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몇 날 며칠을 모래사장 위에서 고민만 하고 있었다.


그렇게 수 일을 고민과 걱정으로 허비했지만, 이 모래사장 위에는 나를 위한 것들은 하나 없었다. 오로지 위협적으로 머리 위를 날으는 갈매기들의 부리에 찢겨 먹이가 되는 것 외에는 남은 운명이 없었다. 


저 드넓은 바다에는 엄청나게 큰 고래도 있고, 현란하게 아름다운 천국 같은 산호초도 있다고 지나가는 가재나 조개들에게 풍문으로 들었더랬다. 내가 가야 할 곳은 결국 저 넓은 바다라는 것을 나는 남들보다 한참 뒤에나 알게 되었다. 저 바다에 가야만 진짜 인생과 모험이 시작될 것이었다.



물론, 바다라고 결코 안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곳엔 모래 위의 갈매기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한 전설의 괴물들이 넘실대는 파도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갈등과 고통을 통과해내지 않고는 진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란 것을 인정해야 했다. 아무리 귀찮아도 힘겨워도 한 걸음씩 모래를 딛고 앞으로 전진해 가야 한다. 외로워도 두려워도 저 물속으로 가지 않는 한, 그 무엇도 시작되지 않을 것이므로.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한 발을 내디뎠을 때조차, 저만치 앞서가는 거북들을 볼 때면 점점 뒤처진다는 사실에 위축되고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바다에 더 빨리 다다른 다는 사실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바다까지 빨리 가는 것이 진정 삶의 본질은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 어리석은 어린 거북들에게 바다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그저 거기에 누가 더 빨리 가는가 가 중요한 듯 보였다. 하지만 막상 바다에 이르고 나자 우리는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 바다로 오는 여정 중에 얻은 그 모든 도전에 대한 결심과 의지, 노력으로 얻은 경험치만이 진정 중요한 것이었다.



바다에서 우리는 얼마나 멀리 갈 것인지 서로 경쟁하거나 겨룰 필요가 없었다. 그곳은 한계도 결승선 따위도 없는 무한한 세계였다. 이 바다에서 각자 살아있는 동안 얼마나 새로운 세계와 대면하고 그곳을 탐험하고 즐기면서 살아남을 것인지가 우리에게 남은 삶의 과제였다.


그렇게 바다에서 진정 내 운명을 충실하게 살아내고 나면, 언젠가 나도 해변으로 돌아가 알을 낳을 것이었다. 그러면 그 알들도 자신의 운명을 살아내기 위해 스스로 깨어나고 또 기어 와야만 한다. 아무리 내가 도와주고 싶어도 그것은 스스로가 해내야 할 자신의 삶의 몫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나는 해변에 아무렇게나 나아진 느리고 보잘것없는 한낱 거북이었다. 바다를 동경하며 아주 느린 걸음으로 한참 만에야 겨우 이 바다에 닿았더랬다. 속도가 중요한 것이라고 착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이제 와서 돌아보니 방향이 진정 본질적인 것이었다.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었다. 결국 그 여정 속에서 나는 얻어야 할 것들을 다 얻을 수 있었다. 그랬기에 이제는 이 드넓은 바다를 마음껏 유영하며 무한한 기쁨 속에 몸을 담글 수 있다.


© Comfreak,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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