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행복해야만 살아낼 수 있다
당신이 행복하기 위해 산다면
행복이란 폭발적으로 한 번에 빵 터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조금씩 소소하게 피어나는 경험이다.
- 서은국, '행복의 기원' 중에서 -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 교수는, 우리는 모두 유전자의 번식과 번영을 위한 생존 기계라는 것이 삶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이 땅 위에 태어난 이유는 그 어떤 고결한 의미와 소명의식을 부여하려 들든 간에 결국 우리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일 뿐이다. 그리고 내가 살아가면서 가지는 모든 신념과 가치관 조차, 그저 유전자를 후세에 전달할 목적으로 생존해내기 위해 가지게 된다는 말이 된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내가 어떤 사람이건 간에 태어나서 자라고 짝을 만나 이렇게 아들을 하나 낳았으니, 이제 나라는 존재의 근본 목적은 달성된 것이다. 앞으로 남은 것은 그 아이가 무사히 잘 자라나서 또 다른 최상의 유전자 조합을 만날 수 있게 되도록 기르고 보호해 나가는 보조적 임무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인생이라는 것이 참 서글프고, 내가 인생을 걸고 추구하고 믿는 모든 것이 사기인 것만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 모든 복잡한 감정과 사고의 메커니즘이 결국엔 그까짓 '생존', 그 하나로 귀결되는 것이라니! 거기에 정작 생존의 주인공은 '유전자'이며, '나'라는 존재는 그 유전자를 담기 위한 한낱 '그릇 (Vessel)'에 불과하다니! 받아들이기엔 다소 충격적이기까지 할 정도이다.
많은 이들은 행복이 인생을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이며, '최상의 선(Summum bonum: 라틴어)'이라고 믿으며 살고 있다. 우리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사는 것이며, '행복하지 않다면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고 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한때는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이기적 유전자'의 리처드 도킨스 교수는 우리에게 이런 화두를 던진다.
그가 제시한 통찰이 내 모든 삶의 가치관을 뒤흔들었다.
그래,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선 (본질적으로는 유전자가 살아남기 위해서라고 해야겠으나) 행복이라는 동기가 꼭 필요했겠구나! 행복이라는 당근 없이는, 통제 불가능한 냉엄한 현실과 야생의 잔학한 야생의 환경을 이겨내고 견디며 존속할 수가 없었겠구나!
우리가 느끼는 이 모든 쾌감과 불쾌감은 호르몬의 분비와 뇌의 전기 신호를 통한 정교한 기계의 메커니즘같이 작용하며 우리의 행복감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사실을 자각할 때마다 마치 인간이 기계 따위(?)와 비슷한 레벨로 강등되는 것 같아 서글픈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거침없는 위대한 우주와 거대한 자연은 결코 우리의 서운함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일찍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소설을 쓴 작가 밀란 쿤데라의 책 타이틀 작명은 가히 천재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 우리의 존재감이란 정말이지 참을 수 없도록 가볍기도 하구나!
신이라 이름 붙인 허구의 절대자를 끌어들이거나, '운명'이라는 매혹적인 플롯을 설정하는 편이 인간 존재의 의미를 훨씬 더 드라마틱하고 로맨틱하게 만들어주기는 한다. 하지만 다소 받아들이기 슬프다 해도, 존재의 의미에 대해 더 이상 의심을 가질 필요 없이 명쾌한 답을 제시하는 최근의 이러한 과학적 가설들은, 차라리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준다. 평생을 탐구해도 영영 규명해낼 수 없는 모호한 경전의 문구와 현란한 미신의 의식에 휘둘리지 않고, 차분하고 냉정하게 우리의 삶과 일상을 바라보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나는 한때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며,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 신념은 물론 내 머릿속에서 저절로 만들어져 나온 것은 아니었다. 외부로부터 어디선가 주입되었고, 세상에서 상투적으로 듣던 철학이자 가치관이었다. 듣기에 좋은 이 말을 나는 아무 의심 없이 한동 안내 가치관 안에 편입한 채 관성대로 믿어왔던 것이다.
하지만, 행복을 근본적인 목적으로 두며 사는 삶은 언제나 내 의식을 목표 지향적으로 이끌었다.
'어떤 조건이라면 나는 행복할 거야!'
'어떤 목표를 성취하고 나면 나는 그때부터 행복할 거야!'
그런 사고방식에 사로잡혀있다 보니, 드높은 목표를 세우고 거기까지 달려가는 동안 맹목적으로 '현재'와 자신을 희생하며, '미래'의 어느 시점을 바라면서 인내하고 견디며 살았던 것이다. 몇 번을 반복적으로 그렇게 해봤지만, 결국 그런 성취의 말미 어디에도 내가 찾던 행복 따위는 없었다. 사실 행복이라는 감정은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 중에 매 순간 느끼고 즐겨야 했던 것인데, 언제나 미래에 초점을 두다 보니 정작 과정은 그저 견뎌야 하는 시련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행복이 도달해야 하는 목표 이후에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실질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실은 지나온 삶 속에 더 만끽하고 향유해야 했던 즐거움이 한가득 있었건만, 먼 훗날의 신화 같은 행복을 위해 나는 당시에 그것들을 외면한 적이 많았다. 행복하기 위해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해내기 위해 행복을 느껴야만 그 동기를 확보하고 더 잘 살아낼 수 있음을 더 일찍 인지했더라면, 원하던 행복을 찾지 못해 방황하며 맞닥뜨린 허무감과 무기력에 시달릴 필요가 없었을 텐데.
행복이란 결국 강도가 아니라, 빈도가 더 중요한 문제였던 것인데. 강한 한 방의 핵폭탄 급 행복보다, 매일마다 소소하지만 빈번하게 일어나는 행복감이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것을. 예전에 나는 미처 몰랐다.
'빨리 돈을 벌어서 경제적 자유를 얻게 되면, 그제야 나는 행복할 것이다'라는 헛된 신념을 가지고 있다면, 일평생 행복을 느낄 순간은 육체와 정신이 다 늙어버린 후에나 올지 모른다. 모든 기반이 마련되면 행복할 것이다라는 생각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 모든 기반은 영원히 마련되지 않을 것이다.
자연은, 그리고 우주는 결코 친절하고 너그럽게 우리에게 모든 조건을 완벽히 충족시켜 주는 일이 없다. 그저 무질서한 혼돈의 상태가 원래부터 정상인 것이고, 거기다가 나름의 질서와 규칙을 찾아내어 의미와 해석을 부여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간의 한 평생 삶인 것이다. 그렇게 나는 살만큼 살다가 언젠가는 사라질 테고, 내 안의 유전자만이 이 땅 위에 남는다. 나의 기억과 삶의 흔적은 어딘가에 남던 말던 괘념치 않는다.
한때는 삶의 의미나, 존재로서의 목적과 이유에 대해 치열하게 탐구하고 사유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런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이 정도면 내 남은 삶을 살아내기에 충분하다 싶을 정도의 답을 찾았다는 신념을 얻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삶을 통틀어 추구해갈 최상의 선이란 이런 것이다.
비록 우주와 대자연은 내 존재에 아무 관심이 없을지 모르지만, 내 입장에선 어쨌든 죽지 않고 생존해내기 위해서는 행복하다고 느껴야 하고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한다면 생존에 대한 내 의지와 열정도 사라질 테니 말이다. 행복하려면 내 뜻대로 내 삶을 이끌어 갈 수 있어야 한다. 내 뜻대로 산다는 것은 내가 살고 싶은 삶을 내가 되고 싶은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번 생에 될 수 있는 최고의 내가 되어 최상의 삶을 추구해 가겠다.
이것이 내 일평생에 있어 살아가는 의미이자, 본질임을 나는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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