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내 삶의 산맥을 만들어낼 힘을 키워준다
얼마 전 한 일간지에 소설가 장강명 작가가 ‘흥미로운 중년이 되기 위하여’라는 칼럼을 썼다. 글의 한 단락이다.
“다른 경험들이 독서를 대신할 수 있을까. 내게는 걷기 운동으로 코어 근육을 단련할 수 있다는 소리만큼 전망 없게 들린다. 한 업계에서 20년 정도 일하면 부장급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그 이상을 원하면 정신에 꾸준히 간접 체험과 지적 자극을 공급해야 한다. 나는 독서 부족이 노년에 마음의 병을 일으킬 거라 믿는다. 삶이 얄팍해지는.” (<중앙일보> 5월 10일)
그러면서 장 작가는 “중년들이여, 책을 읽자”고 했다. 인생의 풍파가 어떤 것인가를 겪어본 사람이라면 그 속에서 자기 삶을 견디고 지켜내는 ‘삶의 근육’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SNS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시비를 거는 사람도 눈에 띄었지만, 장강명 작가의 얘기는 중년과 장년 세대의 공감을 얻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런데 독서가 삶을 두텁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말은 과연 사실일까. 너무도 의례적이고 교과서적인 얘기는 아닐까.
그런데 살면서 겪어보니 사실이었다. 장강명의 말에 공감하는 이유는 나의 개인적 경험과도 일맥상통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래전에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계속 공부를 하지는 않고 방송과 매체들을 통한 시사평론을 주업으로 해왔다. 그래서 학교를 마친 이후로는 그다지 많은 독서를 하지는 못했다. 말만 박사였지 공부를 계속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다시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던 것은 50대 중반 무렵부터였다. 내가 하던 방송 시사평론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외풍을 타곤 했다. 시사평론가는 어느 한 진영의 편이 될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를 성역 없이 비판하는 것이 책임윤리라고 생각했기에 양쪽 진영 모두로부터 미움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오랜 세월 생업이었던 방송활동이 끊기다시피 했던 일들로 이어졌다.
그때 나는 동네 독서실로 들어가서 본격적인 책 읽기를 몇 년 동안 했던 경험이 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나 자신인데, 어째서 외부의 정치적 상황들이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려는 가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래서 내 힘으로 나를 지켜야 한다는 결론이 내린 선택이 독서실로 가서 책을 읽자는 선택이었다. 정치적 환경의 변화가 나를 도와주리라는 헛된 기대를 하지 말고, 세상의 이런저런 일들이 나를 흔들어도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강한 힘을 키우자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들어간 곳이 동네에 있는 독서실이었다. 환멸만을 낳은 채 나의 굴복을 강요하는 세상, 그로부터 단절된 곳에서 지내는 자발적 고독을 선택했다. 강요받은 고독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지만, 스스로 택한 고독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
그래서 수험생들이 다니는 동네 어느 독서실에서 3년 동안 연간 회원권을 끊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수많은 책들을 읽었다. 독서실에서 고등학생들이나 수험생들과 섞여서 공부하는 아저씨가 된 내 모습은 평생 상상해 본 일이 없었다. 무슨 수험서를 놓고 공인중개사 시험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아마 어린 학생들은 대체 무엇하는 아저씨인가 궁금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많이 읽었던 책이 주로 철학, 문학, 예술 등 인문학 관련 책들이었다. 소크라테스를 읽으며 인간의 자기 성찰과 좋은 삶에 대한 의지를 배웠고, 니체를 읽으며 시련을 이겨내는 인간의 강인함을 생각했다. 푸코를 읽으며 자기를 배려하는 삶의 의미를 생각했다. 카프카와 루쉰을 읽으면서는 나와 비슷하게 경계인의 삶을 사는 주인공들을 동지처럼 반갑게 만났다. 세상은 쳐다보고 싶지 않게 되었지만, 대신 책 속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이 내 친구가 되어주었다.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로 방송생활만 하느라고 하지 못했던 공부를, 엉뚱한 사연으로 뒤늦게 몇 년 동안 하게 된 셈이었다. 혼자서 하기 어려운 난해한 철학 공부들은 멀리 인문학 공동체로 강의를 들으러 다니며 배움의 시간들을 가졌다. 읽어도 읽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서들 때문에 인터넷 강의들을 수강하기도 했다. 그냥 책만 읽으면서 그 기간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공부를 하면서 혼자만 알고 있기에는 내용들이 너무 좋아, 몇 권의 인문학 책들을 써서 출간하기도 했다. 여러 곳에서 관련된 인문학 강의를 하기도 했다. 내가 인문학 공부를 하면서 느끼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돌아보면 평생 시사평론을 하던 사람으로서는 색다른 인생여행이었던 셈이다.
그 몇 년간 했던 인문학 공부들은 그 뒤 내가 여러 글들을 쓰는데 더 깊고 넓은 사유를 갖도록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 외로웠던 시절 동네 독서실에 박혀서 공부에 몰두했던 시간은 그 이후 자신의 삶에 큰 힘이 되었음을 실감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힘든 상황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책을 읽고 공부할 수 있었던 시간은, 시련을 마주 보며 견뎌내는 힘을 키워줬음을 나중에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런 시간이 지나고 얼마 뒤에 갑작스럽게 뇌종양 진단을 받고 서둘러 수술을 했다. 수술은 잘되었지만 워낙 위험한 곳의 뇌신경들을 건드렸기에 후유증도 심각해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악몽과도 같았던 처절한 시간이었지만, 수술 전날부터 병원생활 8개월 내내 지극히 평온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의 그런 평온한 마음이 어떻게 가능한지 생각해 보았다. 물론 가족들의 정성 어린 도움이 준 힘도 컸다. 그런데 놀랄 만한 것은, 그 이전 몇 년간 했던 독서의 힘이 느껴진 일이었다.
병마와 싸우기 이전의 몇 년 동안 읽었던 책들이 내 삶의 근육을 이렇게 키워놓았나 보다 생각했다. 철학과 문학과 예술의 많은 고전들을 읽으면서 인간의 삶에 대해,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해,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자신을 지키는 것에 대해, 삶과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많은 현인들의 얘기를 그저 훌륭한 얘기로만 넘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견주어 가며 나는 어떠한가를 생각하면서 읽어간 독서 태도의 영향이기도 했을 것이다.
누구나 살다 보면 세상이 나를 흔들어대는 일들을 많이 겪게 된다. 예고 없이 닥친 시련 앞에서도 두려워하거나 너무 불안해하지 않고 자신을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키고 이후를 기약할 수 있다. 물론 그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내 경우는 동네 독서실에 박혀서 책을 읽고 쓰면서 훗날을 기약했던 것도 나만의 방식이었던 셈이다. “그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던 니체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책을 읽는 것은 본질적으로 고독한 행위다. 다른 사람들과 섞이지 않고 혼자서 읽는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인간은 가장 고독할 때 책을 찾는다. 자신이 세상 속의 이방인이라는 생각이 들 때 나와 통하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책 속으로 들어간다. 도스토옙스키는 스물네 살 때 집에서 책 읽기에 몰입했다고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독서 이외에는 할 일이 없었고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었다. 그리고 당시 내 주위엔 존경할 만한 것도, 마음이 끌리는 것도 없었다. 게다가 나는 우울함에 사로잡히곤 했다.” (『지하생활자의 수기』)
그럴 때 마음을 잡아주는 것이 책이다. 내가 다시 책에 빠져들었던 것도 가장 고독했을 때였다. 나와 이야기를 나눌 누군가를 책 속에서 찾으려고 나섰다. 그랬더니 책 속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나와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었다. 내가 하고 있던 고민을 2500년 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철학자와 작가들도 하고 있었다. 삶의 동지를 만난 기분이었다. 아, 나만이 아니었구나! 그들도 외로웠구나. 그럼에도 자신의 얼굴을 잃지 않았구나.
나는 지금도 책 속에서 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대화를 나눈다. 그 대화는 다시 내 안에서 자아와의 대화로 이어진다. 책을 읽는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작가와 등장인물들, 그리고 나와 자아가 한데 섞여서, 다른 곳에서는 꺼낼 수 없었던 대화를 나눈다. 책 읽기는 지극히 고독한 행위이지만, 그 고독을 이겨내는 힘을 준다.
책을 읽는다 해도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선택이 쉽지는 않다. 사람마다 취향과 관심도 다르다. 다만 권하고 싶지 않은 책들이 있다. 첫째, 인문학이라는 이름은 붙여놓았지만 마치 입시생 참고서 같은 분위기의 책들이 있다. 인문학 독서의 핵심은 읽으면서 사유의 힘을 키우는 데 있다. 그런데 입시 참고서를 방불케 할 정도로 요령 있게 요약해서 내놓은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아마도 쉬운 방법과 속성으로 박학다식해지고 싶은 독자들의 욕망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책들을 읽는 데는 특별히 생각할 것이 없다. 그냥 친절하게 다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너무 쉽게 읽히는 그런 책들은 대개는 읽고 나도 남는 것이 없어 결국 내 것이 되기 어렵다. 아무리 읽어도 삶의 근육에는 별로 도움을 주지 않는 책들이다.
두 번째로는 너무 정치적 시류를 타는 책들은 권하고 싶지 않다. 보통 정치 책들은 잘 팔리지 않는데, 유독 진영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쓰거나 주제로 다루어진 책들은 베스트셀러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여야, 보수-진보를 불문하고 나타나는 현상이다. 책도 각 정치적 진영이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내는 셈이다. 물론 특정한 정치적 인물이 좋거나 관심이 있어서 읽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 생각만큼 많은 콘텐츠를 담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다. 속된 말로 ‘이름 빨’로 많이 팔려 베스트셀러로 오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주제에 관한 더 깊이 있는 책들이 있는데 정치적 진영에서 인기 있는 인물이 저자라는 이유로 베스트셀러가 되는 경우들을 보면 ‘독서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반대로 내게 필요한 책은 어떤 것들일까. 우선 자신이 하고 있는 일과 관련하여 개인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는 교양서들은 당연히 유익하다. 당장 먹고사는 자신의 일만큼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자신의 생업을 좀 더 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책은 내게 필요한 책이다.
그다음으로는 가능하다면 고전 읽기를 권하고 싶다. 철학, 문학, 예술, 과학, 종교, 어느 분야든 고전은 고전으로 불리는 이유가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의미와 가치가 살아있는 책들이다. 혹여 너무 어려운 책이라면 해설서의 도움을 받아가며 읽더라도 고전들을 많이 읽는 것이 인생에 피가 되고 살이 된다. 고전에서만 만날 수 있는 깊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유튜브나 팟캐스트 등을 통해 고전들을 요약해서 해설해 놓은 콘텐츠들도 많는데, 고전을 읽기 전에 줄거리를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그것만 접하고는 고전을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직접 원전의 문장들을 읽었을 때만 맛보는 고전들의 매력이 있다.
세 번째로는 국내 작가들의 문학 작품들도 많이 권하고 싶다. 고전들은 시대를 관통하는 보편적 삶의 얘기들이지만, 국내 작가들의 저작들은 우리들의 이야기인 경우가 많아 공감의 폭이 넓은 편이다. 요즘은 어떤 국내 작가들의 책이 좋고, 어떤 책들이 나왔는지에 관심을 갖는 것도 슬기로운 독서생활의 일부이다.
독서 얘기를 하면서 도서관 얘기를 빼놓을 수는 없는 시대이다. 요즘은 각 지역 곳곳에 있는 도서관들이 무척 좋아졌다. 도서관을 책을 대출하고 반납하는 곳으로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열람실의 환경들도 많이 쾌적해졌으니 도서관에 앉아 책을 읽는 것도 훌륭한 여가생활이다. 그리고 도서관이 제공하는 각종 서비스들을 파악하여 이용한다면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을 더 편하고 빠르게 접할 수 있는 기회들이 많아졌다. 필자가 이용하는 지역도서관에서는 신간을 신청해서 승인이 되면 동네 책방에서 갖다 놓아 거기서 일단 구매를 한다. 그리고 3주 안에 책을 다 읽고 반납하면 책구입비를 돌려받고 그 책은 도서관에서 다시 소장용으로 구입해 간다. 일단 독자 입장에서는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기존의 희망도서 신청 보다도 부담 없이 빠르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이다. 내가 사는 지역의 도서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잘 이용하는 것도 슬기로운 독서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니체의 분신이었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산이 높아질수록 나와 함께 산을 오를 자는 그만큼 적어진다. 나는 더욱 신성해지는 산들로 하나의 산맥을 만들어낸다.”
살다 보면 같은 산을 함께 오르려는 사람이 주위에서 점점 적어짐을 발견하게 된다. 각자의 인생이란 것이 있기에 자연스러운 순리이기도 하다. 다만 어떤 경우이든 상관없이 책은 내 삶의 산맥을 만들어낼 힘을 키워준다. 여러분도 저마다 책을 통해 자신의 산맥을 만들어가기를 권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