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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선 Sep 08. 2023

세상은 어려운데, 나는 행복해도 괜찮을까

<내 인생의 행복 찾기 연재 제1회>

"내가 행복해야 세상이 행복할 수 있다."

* 이 연재는 행복하게 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얘기입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산다.
서점가에서 불변의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책들이 ‘행복’에 관한 것임을 이를 잘 말해준다. 모두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러할 것이다. 행복한 삶에 대한 소망은 가진 사람이나 못 가진 사람이나, 높은 지위의 사람이나 낮은 지위의 사람이나, 너나 할 것 없이 공통적이다. 일찌기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우리가 달성할 수 있는 모든 선 가운데 최고선은 행복”이라고 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덕(德)을 쌓아야 하는데 이성에 알맞은 덕스러운 활동을 통해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강조했다.


(사진=pexels)


행복은 소소한 기쁨에서 생겨나는 것


 다만 무엇이 행복인지, 행복한 삶에 대한 생각은 저마다 다르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를 시작하면서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다”고 했지만, 막상 행복의 의미와 색깔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들에게 행복은 대단한 것을 가져야만 이루어지는 성취의 대상이다. 많은 재산, 높은 지위나 권력, 화려한 명예같이 자신의 많고 큰 욕망이 채워져야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의 소소한 행복을 무엇보다 기쁘게 느낀다. 이들에게 행복이란 그리 거창하고 대단한 게 아닐 수 있다. 그저 소박하게 자기만의 소소한 기쁨을 느끼며 마음 편히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것이 곧 행복이라 말해도 과장된 말은 아니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깨끗한 속옷을 잘 쌓아두고 입는 것에서 일상의 행복을 느낀다고 말한다. “또 런닝셔츠도 상당히 좋아한다. 막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퐁퐁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그 기분이란 역시 소확행의 하나이다.” 하루키는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에서 이렇게 말한다. “생활 속에서 개인적인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크든 작든 철저한 자기 규제 같은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꾹 참고 격렬하게 운동을 한 뒤에 마시는 차갑게 얼린 맥주 한 잔 같은 것이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 하고 혼자 눈을 감고 자기도 모르는 새 중얼거리는 것 같은 즐거움, 그건 누가 뭐래도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참된 맛이다.”

세계적인 작가가 느끼는 행복의 크기가 너무도 소소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의 행복은 크고 작음에 의해 우열이 구분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행복을 어떻게 하면 누릴 수 있을까에 있다. 나는 어떤 행복을 소망하면서 살아가고 있을까. 물론 우리가 사는 시대가 좋은 환경에 둘러싸여 있다면 각자가 원하는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큰 어려움 없이 이루어질지 모른다. 그냥 가만히만 있어도 행복할 수 있는 세상말이다. 그런데 그런 세상이 있었다는 얘기를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동서고금 역사의 어느 시기이든 그 시대가 겪는 어려움은 있었고, 그래서 행복한 삶에 대한 동경은 언제나 미완의 바람으로 남겨져 있곤 했다. 그러니 행복은 그냥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닐 게다. 하루키의 말처럼, ‘소확행’도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거친 사람이 맛보는 즐거움이다.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 있었기에 그 행복이 ‘확실한’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성실한 삶의 태도를 가진 사람이라야 비로소 자기만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셈이다.


 위기의 시대, 행복할 수 있을까


하물며 위기의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오늘은 더욱 그러하다. 21세기 전반기의 한가운데 있는 오늘 우리가 맞고 있는 위기는 개별 국가만의 것이 아니라, 지구적 차원의 위기이며 인류 전체의 위기이다. 당장 시간이 갈수록 실체가 드러나고 있는 기후위기가 그러하다. 빠르게 진행되는 기후변화를 멈추게 하지 못한다면 인류의 재앙은 피할 길이 없다.

코로나 시대 이후의 세계에 닥친 복합 경제위기는 그렇지 않아도 코로나의 터널 속에서 고통받아왔던 전세계의 고통을 더욱 깊게 만들어가고 있다. 코로나 위기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넘쳐난 유동성으로 인해 각국의 물가상승률은 가파르게 치솟았다. 물가와 금리 상승은 소비와 투자를 위축시키니 경기침체를 예고하게 된다. 우리 경제 또한 물가·환율·금리가 동시에 상승하는 3중고를 겪게 되었고, 생산·소비·투자까지 위축되는 복합 경제위기에 처할 위험이 존재한다. 이러한 경제위기의 피해는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타격을 입히게 된다.

이러한 전지구적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세계 각국의 힘이 모아지는 협력적 질서가 요구된다. 하지만 오늘 세계는 미-중 간 갈등의 심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세계대전의 위험, 한반도에서의 핵위기와 군사적 긴장 고조 등이 이어지면서 국제적 갈등 요인들이 급증하고 있는 환경이다. 정치군사적, 경제적, 환경적으로 지금 세계는 전례없이 불확실한 위기의 시대를 맞고 있다.

세계적인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은 최근 출간된 『회복력 시대』에서 죽어가는 진보의 시대를 해체하고 부상하기 위한 새로운 문명의 서사를 제시하고 있다. 냉정하고 무심한 이성이 아니라, 공감과 생명애가 인류의 새로운 규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리프킨의 진단이다. 그러나 미래를 향한 그같은 방향 전환들은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전세계의 국가와 기업과 시민사회가 그 방향에 관한 합의를 이루어내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행복한 삶에 대한 욕구를 포기할 이유도 없고 그래서도 안될 일이다.


내가 행복해야 세상이 행복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힘들고 어렵다 보니, 내가 행복해도 될까, 행복한 삶을 그리며 살아도 되는 걸까를 스스로에게 묻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세상을 걱정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자신의 행복 찾기에 매달리는 나의 모습이 어쩐지 이기적인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각자도생 하란 말로 여겨지기 쉽다. 하지만 소설가 앙드레 지드는 일찍이 『새로운 양식』에서 우리가 행복해도 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이 땅 위에는 너무나 많은 가난과 비탄과 어려움과 끔찍한 일들이 가득해서 행복한 사람은 자기의 행복을 부끄러워하지 않고는 행복을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스스로 행복해질 수 없는 자는 남의 행복을 위하여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나는 나 자신 속에 행복해야 할 절박한 의무를 느낀다.”

내가 행복해야 다른 사람도 행복할 수 있고 세상이 행복할 수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앙드레 지드는 또 다른 작품인 『지상의 양식』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는 계명에 대해 이렇게 항변했다.

“신의 계명들이여, 너희가 나의 영혼을 아프게 했다. 신의 계명들이여, 너희는 열인가 스물인가? 어디까지 너희의 한계를 좁히려는가? 항상 더 많은 금지된 것들이 있다고 너희는 가르치려는가? 지상에서 아름다워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한 목마름에는 또 새로운 벌(罰)이 약속되어 있다고 가르치려는가? 신의 계명들이여, 너희가 나의 영혼을 병들게 했다. 너희는 내가 목을 축일 수 있는 유일한 물 주위를 벽으로 막아놓았다.”

앙드레 지드는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토로했다. 본성에 따른 욕망을 갖는 권리에 대해 말했다. 걷고 싶은 욕망, 거기엔 하나의 길이 열리고, 쉬고 싶은 욕망, 거기에 그늘이 부르고, 깊은 물가에서는 헤엄치고 싶은 욕망, 침대가에 이를 때마다 사랑하고 싶은 욕망 혹은 잠자고 싶은 욕망. 그래서 대담하게 각각의 사물 위에 손을 내밀었고 자신의 욕망의 모든 대상들에 대하여 권리가 있다고 믿었음을 말했다.

그가 말한 욕망은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이었다.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을 밟고 가거나 피해를 주는 탐욕적인 욕망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런 욕망은 숨길 필요가 없는 자신의 권리인 셈이다.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기쁨, 좋아하는 것을 하는 즐거움, 마음의 평온, 편안함과 안락함이 주는 충만함, 그리고 사랑의 행복, 이 모든 것은 인간이라면 갖고 태어나는 본성이다. 굳이 그것을 감출 이유도 억압할 이유도 없다.

행복은 사실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물론 공동체는 구성원들의 행복한 삶이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가야 하지만, 행복에 대한 느낌은 개인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을 보면 그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에 대한 고백이 나온다. 그를 돌봐주고 사랑하기도 했던 바랑 부인과 함께 보낸 시간은 루소의 삶에서 행복의 절정을 이룬다.

“해가 뜨면 일어나니 행복했다. 산책을 하니 행복했다. 엄마를 보니 행복했고 그녀 곁에서 물러나니 행복했다. 숲과 언덕을 두루 돌아다녔고 골짜기를 떠돌아 다녔으며, 책을 읽었고, 빈둥거렸으며, 정원을 가꾸었고, 과일을 땄으며, 살림을 도왔는데 행복은 어디서나 나를 따라다녔다. 행복은 무엇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내 자신 안에 있어서 단 한순간도 나를 떠날 수 없었다.” (장 자크 루소, 『고백록』, 6권)

여기서 행복은 어떤 목표에 대한 성취의 결과가 아니라 내 존재 자체에서 나온다. 자신의 존재를 느끼고, 그 존재가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루소에게는 최고의 삶이었던 것이다. 반대로, 자신의 존재감을 타인의 시선과 평판에서 찾는 사람은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가 없다. 이렇듯 루소에게 행복은 자기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루소가 느꼈던 인생 최고의 행복이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원하는 행복의 색깔과 느낌은 저마다 다르기에 행복은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없고 개인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인생의 마지막 시기에 자신에게로 돌아갔다. 평생 권력에 대한 비판의 철학을 했던 푸코였지만, 생애 마지막 3년 동안 주체와 진실의 관계에 집중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자기 배려’라는 개념이었다. 푸코에 따르면 “자기 배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이고, 자기 자신을 돌보는 행위이며, 자기 자신에 몰두하는 행위”이다. 자기 자신을 배려한다는 것은 자신의 시선을 외부로부터 ‘내부’로 이동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푸코의 ‘자기 배려’가 권력에 대한 비판을 포기하고 개인적 윤리의 장으로 피신한 것은 아니었다. 푸코는 자기 점검과 자기 수양을 거친 윤리적 주체가 진실한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푸코의 자기 배려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신을 돌볼 줄 아는 삶은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일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 격정적이었던 사람도, 나이가 들면서 자기를 돌보고 마음의 평온함을 찾고자 하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그것을 세상으로부터의 후퇴나 철수라고 보면 단편적인 해석이다. 푸코가 말했던 ‘자기 배려’가 그것을 설명해준다.

행복해도 괜찮아


때로는 나만 생각하고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갖는 것, 그래서 나의 행복을 찾으려는 것. 그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내 삶을 충만하게 만들기 위한 인간 본성의 욕구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인생의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 삶의 행복을 쟁취하기 위한 삶의 혁명가가 되자.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행복해도 괜찮아. 나는 행복하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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