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에서 투병 중에 책을 쓴 이유
지금 내가 세상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글쓰기다. 재활을 계속해서 몸이 정상으로 회복되어야 사회적인 활동이 가능한 상황이다. 마비되었던 혀가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 발음이 어눌하다. 혀의 힘이 약해져서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혀가 정상 상태로 돌아와야 전처럼 방송이나 강의도 가능할 것이다.
연하장애로 음식이나 물을 제대로 삼킬 수가 없으니 사람들을 만나 함께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런 후유증이 회복될 때까지는 은둔생활을 해야 할 판이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글을 쓸 수 있는 인지능력과 오른손의 능력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사실이다. 수술하기 전 집도의 선생에게 수술 후유증이 따를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이렇게 물었다.
“인지능력에는 문제가 안 생기나요?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서….”
“대뇌가 아니기 때문에 인지능력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대답을 듣고 안도했었다.
수술을 앞두고 후유증으로 인해 신체의 어느 곳에 불편함이 생기더라도 감수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면서도 생각하고 쓸 수 있는 능력만큼은 지켜지기를 간절히 원했다. 나에게는 그것이 존재의 근거였다. 생각하지도 글을 쓸 수도 없는 내 모습만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수술 직후에도 나의 글쓰기는 다시 이어졌다. 수술이 끝나고 중환자실로 옮겨진 이틀 뒤, 나는 휴대폰을 건네받아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 수술에 임하기 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제마음은 지극히 평온합니다. 의식이 깨어나고 눈을 떴을 때 종양을 떼어낸 머리는 맑았습니다. 뇌수의 물길이 트인 머리는 마치 새로운 아침 해를 맞는 느낌이었습니다. ........월요일에 일반 병실로 갑니다. 더 회복되면 다시 소식 전하지요. 걱정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하지만 이 글에 쓴 내용과 달리 월요일에 일반병실로 가지 못하고 중환자실에 여러 날 더 있어야 했다. 폐렴에 걸리고 호흡곤란이 계속되는 등 상태가 안좋아졌기 때문이다. 페북에 올라온 글을 보고 상태가 좋은지 알고 문병을 왔던 지인들은 이런 상태에서 그런 글을 올렸느냐며 놀라기도 했다.
이후에도 내 상태는 앞으로 갔다 뒤로 가기를 반복했다. 말 그대로 힘든 투병의 시간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나는 페북에 가끔씩 글을 올렸는데, 이를 두고 아내와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아직 생사가 어찌될지도 안심할 단계가 아니고 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많은 사람이 보는 페북에 글을 올리는 데 대해 아내는 강하게 만류하고 나섰다.
평소 내가 하는 일이면 무조건 이해해주던 사람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회복에 전념해야 할 중대한 때에 마치 다 낫기라도 한 듯이 글을 올리는 나를 만류하며 설득했다. 나는 힘든 때라 하더라도 글을 쓰는 것이 내 존재의 근거이며 어려운 상황을 버티는 힘이 된다고 아내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아내는 몸을 추스르고 나서 그때 마음껏 쓰라며 한사코 말렸다.
마침내 아내는 “소원이야. 제발…”이라는 문자를 보내왔다. 나를 살려놓겠다고 밤낮으로 애를 쓰고 있는 아내가 ‘소원’이라는데…. 이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내가 물러서야 할 사안이라고 판단했다. 소원이라 하지않나.
생각해보니 내가 조급했었다. 그럴듯한 이유를 들며 글을 써서 올리곤 했지만, 그 얼마간의 시간도 못 참는 조급증이거나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관종’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의 설득이 옳았다. 우선은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하고 나서 그때부터 다시 글을 쓰기로 했다. 다시 페북에 글을 올리고 매체에 연재 칼럼을 기고하기 시작한 것은 몸을 어느 정도 추스르고 난 뒤였다.
사실상 병상에서 글쓰기는 매우 힘들고 불편하다. 몸이 충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침상에 밥상을 펴놓고 앉아서 노트북으로 글을 쓰기가 힘들다.
그러다 보니 누운 상태에서 휴대폰에 깔려 있는 앱에 원고를 쓰게 된다. 한동안 내가 외부에 기고했던 글은 그렇게 폰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입력해서 완성된 것이다.
병상에서 병을 상대하는 것만도 벅찰 텐데 어째서 나는 불편한 환경에서 그렇게까지 글을 쓰려 했던 것일까. 어디에든 글을 쓰는 과정은 나 자신이 살아서 존재함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물론 그렇게까지 하며 글을 쓰지 않으면 네가 살아 있음이 확인되지 않느냐는 반문도 가능하다.
하지만 사람마다 힘을 만들어 내는 방식은 다르다. 병상에서는 다른 생각 하지 않고 치료에만 집중하는 것이 최선인 사람이 많겠지만, 내경우는 글을 씀으로써 힘을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글쓰는 행위가 육체적 건강에도 도움을 준다고 믿고 있다. 내 힘의 마중물인 셈이다. ‘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
장소가 어디든, 글을 쓰는 행위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글을 씀으로써 자아와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자신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 오랫동안 병실에 있으면서 나에게는 고통을 이겨낼 강한 의지 혹은 앞으로의 새로운 삶을 위한 다짐이 필요했고, 글쓰기는 바로 그러한 시간이었다.
전기 작가 우드 콕은 조지 오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살아온 인간과 글로 표현된 인간의 모습이 이처럼 일치하는 작가를 결코 만난 적이 없다.”
글은 자신의 진실을 찾아내고 담아내는 그릇이 될 수 있다. 그것을 계속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래서 지금 이 책도 병실에서 쓰고 있다. 일찍 소등해서 모두가 잠들어 있는 병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