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시련을 대하는 태도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by 유창선


지극히 평온한 마음으로 수술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일로 생각했다는 말은 아니다. 어디 사람이 그럴 수 있겠는가. 수술을 앞두고 여러 가지 정리를 했다. 고정 출연을 하던 TV와 라디오 프로그램이 여섯 개 정도 되었는데, 불가피하게 하차해야 하는 상황을 설명하고는 언제 다시 방송이 가능할지는 수술을 받아봐야 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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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나 공과금 밀린 건 없는지 점검하고 통장도 정리했다. 혹시라도 수술이 잘못되어 죽거나 인지 기능에 이상이 생길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다. 만약 나에게 이상이 생긴다 해도 아무문제가 없도록 미리 처리해두고 싶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수술로 생긴 후유증으로 오랜 시간 고생하는 것이 절망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멀쩡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된 것이 기가막힐 노릇으로 생각될 수 있다. 후유증이 정상으로 회복되지 못한다면 앞으로 남은 생에서는 사회적 활동은 포기하고 은둔 아닌 은둔 생활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여러 면에서 한평생 살아가면서 두 번 있기도 어려운, 아니 두 번 있어서는 안 되는 큰 사건일 것이다. 어려운 과정이었고 앞으로도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극히 평온한 마음으로 내게 주어진 시련을 받아들였다. 입원 생활 내내 마음의 평정을 잃은 적은 거의 없었다. 마음의 동요 없이 수술을 받았고 살아나고자 했으며 신체에 남은 불편함을 이겨내기위해 최선을 다했다.

왜 하필 내게 이런 병이 생겼는지를 원망하지 않았고, 그래도 목숨을 건지고 몸이 조금씩 회복되어 가고 있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긍정적인 태도로 잘 견디고 있다고 자평하고 있다. 힘든 상황에서도 절망 대신 희망을 품을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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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려 했고, 둘째는 사랑을 지키고 싶었다. 누군가는 반문할지 모른다. 아파서 누워 있는 병자가 존엄할 수 있는가. 공허하고 구름 잡는 거창한 얘기가 아닌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지킨다는 것은 멀리 있는 공허한 말이 결코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부여된 삶의 숙제이다. 우리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내 삶의 주인으로서의자존을 포기하고 그저 주어진 운명에 복종하는 존재로 전락하는 일이다.

힘든 상황에서도 자기 앞길과 운명을 자신의 힘으로 일궈가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것. 어두운 절망 속에서도 긍정의 끈을 이어가려는모습. 거기에서 인간의 고귀한 가치와 힘이 발현되는것 아니겠는가. 나는 주어진 상황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 지점에서부터 다시 새로운 삶을 만들어나가기위해 노력했다.

이렇게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이 나 자신만을 위한 일은 아니다. 나를 끔찍이도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서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으려 노력했다. 내가 낙담하고 절망하며 고개를 떨구는 모습은 가족들에게 더 큰 슬픔을 안겨줄 것이다.

죽은 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그러니 자신은 죽어도 슬프지 않다.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나는 흔들리지 않고 견뎌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살고자 용기를 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시련의 시간을 피할 수가 없다. 여러 가지 얼굴을 한 시련이 예고 없이 엄습해온다. 인간의 힘으로 그것을 막아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 예고 없이 찾아온 시련을 피할 방법은 없지만, 그시련에 대처하는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 인간은 주어지는 운명 앞에 무릎 꿇고 마는 피동적 존재가 아니다. 의지를 갖고 시련을 감당하고 이겨내는 태도를 갖는 데 인간만의 고유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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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자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에서 경험한 인간의 모습을 그린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은 여러 개의 사물 속에 섞여 있는 또 다른 사물이 아니다. 사물들은 각자가 서로를 규정하는 관계에 있지만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규정한다. 타고난 자질과 환경이라는 제한된 조건 안에서 인간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판단에 달려 있다.

나는 살아 있는 인간 실험실이자 시험장이었던 강제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내면에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다.”

나치에게 끌려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고초를 겪었던 프랭클은 힘든 수용소 생활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은 사람들은 곧 병에 걸려 죽었다고 기록했다. 이는 용기와 희망 혹은 그것의 상실이 인간의 면역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프랭클은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우리가 사는 환경은 우리 뜻대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주어진 현실을 원하지 않았다고 그것을 거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 것이 또한 인간의 삶이다.

언제나 나의 태도를 선택하고 나의 길을 만들어 가는 것은 나 자신이다. 길을 아는 것과 그 길을 가는 것은 다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직접 길을 가는 것이다. 때로는 시련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더라도 내 의지로 나의 길을 갈 때 존엄한 인간으로서의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통증은 이 시간을 인내하며 지나고 나면 사라질 것이다.

그때 우리에게는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힘이 생겨날 수 있다.



제가 쓴 『나를 위해 살기로 했다』 (사우, 2019)의 내용 가운데 일부를 브런치에 맞게 다시 정리하여 연재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책 소개를 둘러보세요.


책 소개 바로가기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5434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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