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
레프 톨스토이가 『참회록』을 완성한 때가 그의 나이 52세 되던 해였다. 톨스토이는 이 책에서 그때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해 근본적으로 참회한다. 그는 자신이 완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의 허상을 고백한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것을 완성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도덕적 완성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었지만, 그것이 곧 일반적 완성으로 바뀌어버렸다. 즉, 자기 자신 앞이나 신 앞에서 더 훌륭해지려는 욕망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더 훌륭해지려는 욕망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더 훌륭해지려는 이 갈망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강해지려는 욕망, 즉 다른 사람들보다 더 명예롭고, 더 중요하고, 더 부유해지려는 욕망으로 재빨리 바뀌어 버렸다."
톨스토이는 “나는 왜 사는가? 무엇을 구하는가?”라는 삶의 의미에 대해 스스로 던진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나는 전혀 아무것도 답할 수 없었다”고 그는 고백한다. 19세기를 살았던 톨스토이의 고뇌는 오늘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중환자실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새로 태어난 느낌이었다. 생과 사의 기로에서 나는 그렇게 집착하며 살아왔던 많은 것이 사실은 부질없음을 생각했다. 살아 있음을 확인한 순간 본능적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많은 것을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은 지난 삶이 그만큼 무거웠다는 의미가 된다. 역사에 눈뜨고 시대를 고민하면서, 그리고 그 한복판에서 실존의 고민을 하면서 삶이 무거워졌다.
그렇다고 그 이유가 전부였을까. 나 자신을 옥조이며 삶을 버겁게 만든 것들이 있었다. 톨스토이가 참회했듯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더 훌륭해지려는 욕망’이 그것이었다. 물론 나는 정의로운 삶을 살고자 했다. 아무리 어려워도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해왔다.
그러나 정의로움 뒤에 나의 숨겨진 욕망이 있었음을 발견하곤 했다. 때로는 ‘나는 정의롭다’는 당당함조차 자신의 욕망과 뒤섞일 수 있다. 나는 정의로우니 남들과 다른 사람이라는 선민의식이 또 다른 집착에 갇히게 만든다. 무한 욕망이 지배하는 사회를 그렇게 비판해왔건만, 자신은 남들과 다른 존재로 돋보이고자 하는 욕망에 다시 사로잡히게 된다.
특히 진보임을 자처했던 많은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이 그런 우월의식이었다. 나 자신은 그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웠던가를 돌아보게 된다. 그런 욕망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면, 이제는 그조차도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 ‘보여주기 위한 정의’는 진실이 아니다.
건강을 잃었을 때, 그동안 너무도 당연하게 누려왔던 일상의 소중함을 생각했다. 걸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있는 것의 소중함을 생각했다. 휴일날 병원에서 외출하여 선정릉을 걷다 보니 오랜만에 맡은 나무와 숲 냄새, 날아다니는 새들의 소리, 빗방울까지도 소중하게 여겨졌다. 이 자연을 다시 만나기 위해 그렇게 견뎌냈나 보다, 생각했다.
일상을 먼저 사랑하는 인간이 되려 한다. 큰 삶이 아니라 사소한 삶을 살고 싶다. 마음 가는 대로 사는 삶. 누구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내 발길 가는 대로 사는 삶. 고요히 나 자신을 배려하며 살아가는 삶. 그것이 본시 내가 살고 싶었던 삶이 아닐까. 그러한 삶속에서 나는 진정한 자유를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사소한 삶이 나를 자유케 하리라.
그렇게 사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인간의 삶에 의미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 주인공 필립은 여러 겹으로 구속된 삶을 살아가며 허덕였다. 자유를 그리던 그는 이런 얘기를 접한다.
“인간은 태어나서, 고생하다, 죽는다. 인생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인간의 삶에 무슨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태어난다거나 태어나지 않는다거나, 산다거나 죽는다거나 하는 것은 조금도 중요한 일이 아니다. 삶도 무의미하고 죽음도 무의미하다.”
이 말을 들은 필립은 벅찬 기쁨을 느꼈다. 소년 시절 신을 믿어야 한다는 무거운 신앙의 짐을 벗어버렸을 때 느꼈던 것과 같은 기쁨이었다. 이제 책임이라는 마지막 짐까지도 벗어버린 기분이었다. 자기 존재의 무의미함이 오히려 필립으로 하여금 힘을 느끼게 해주었다. 삶의 의미라는 굴레로부터 구속당했던 필립은 비로소 자유를 느끼게 된 것이다.
필립의 이 같은 생각에서 밀란 쿤데라가 말하는 ‘무의미의 축제’를 떠올리게 된다. 그는 인간의 삶이란 아무런 의미 없음의, 보잘것없음의 축제일 뿐이며 이 ‘무의미의 축제’야말로 우리가 받아들이고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말을 삶에 대한 허무주의적 사고로 받아들이면 오독이다. 삶의 무의미가 의미의 배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삶의 의미라는 것이 인간의 목적이 되고 굴레가 되어 구속당하는 삶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어야 한다는 뜻이다.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강박은 우리로 하여금 또 다른 집착에 갇히게 만든다. 우리 삶에는 모두가 따라야 할 어떤 객관적이고 당위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다양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모두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삶의 의미란 없다. 누구에게든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정해진 것은 없었다.
각자의 삶의 의미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저마다 삶의 의미를 만들어갈 때 비로소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