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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윤원 Nov 20. 2020

친절에는 이유가 필요하다

퇴사한 간호사의 취준일기. 그대는 한 순간도 빛나지 않던 순간이 없다.

열 네 번 째, 친절에는 이유가 필요하다


"여기 이리 와서 이것 좀 볼래?" 친절하고 상냥한 목소리였다.

"네, 선생님!" 스테이션 밖에 있다가 선배 선생님이 부르시는 소리에 달려갔다.

"뭐야, 네가 여기에 왜 왔어?" 친절했던 말투가 한 순간에 변했다. 그랬다. 나를 부르는 소리가 아니었다. 선생님은 자신의 5살 딸과 영상통화하고 계시는 중이었다. 


"내가 설마, 너한테 말하는데 이렇게 친절하게 말하겠니? 네가 내 딸도 아니고."

"네, 죄송합니다."


친절함. 친절함에도 이유가 필요했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니까 혹은 내가 잘 보여야 하는 사람이니까. 나는 그 어느 곳에도 해당되지 않기에 그 선생님이 나에겐 친절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난 선배 선생님들이 조금만 친절하게 말씀해주시면 정말 감사할 거 같다고 생각했다. 나도 내가 계속 실수하고 답답하게 구는 거 정말 잘 알고있다. 역량부족이고 경험을 계속 쌓아야 한다는 거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난 선배님들의 친절을 아주 조금은 조금은 바랬다.


드라마 미생을 보면 장그래가 말한다.

"알려 주실 수 있잖아요. 모르면 가르쳐주실 수 있잖아요."

이 드라마를 볼 때는 아무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보니 사회초년생에게 이 대사는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대사였다.


선배들이 가르쳐주시기를 바라지 말고, 선배들의 친절을 바라지 말고 네가 능력 있어서 일을 잘 해내면 되는 거 아니냐고?


난 간호대학에서 정규과정을 이수했고 4년동안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남들이 놀러다닐 때도 훌륭한 간호사가 되고 싶어서 매일 열심히 공부하고 연습했다. 그런데 사회는 달랐다. 내가 지금까지 배웠던 지식은 모두 쓸모 없는 지식이었고, 현재 행해지고 있는 치료와는 동떨어진 옛날의 지식들이었다. 하루하루 의료현장은 변해갔지만, 학문으로서의 의학 지식과 간호학 지식은 책 속에 멈춰있었다. 


그러다보니 병원에 입사해 처음부터 일을 잘하는 신규간호사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따로 종이로 써진 프로토콜 또한 없기에 경험 많은 선배들이 하시는 모습을 보고 따라해야 했다. 그리고 선배들의 경험을 듣고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선배들에게 잘 보여야만 하는 곳이였다.


임상에서, 병동 현장에서 중요한 것은 시스템을 익히는 것이었다. 언제 입원과 퇴원이 이루어지는지, 언제 검사가 이루어지는지, 검사 전에 어떤 처치와 확인서를 받아야 하는지, 검사 후에는 수술인지 확인하고, 수술을 하면 수술 전 처치, 후 처치, 경과확인 등 이 수많은 프로세스에 따른 간호사의 업무를 모조리 선배들의 말을 통해서만 익혀야했다. 


그리고 간호사는 환자에게 약물을 투여하기 전 마지막 단계이기 때문에 의사의 처방을 꼭 더블체크 해야만했다. 내가 마지막 경계선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내 실수를 최대한 줄여나가야 했다. 그렇게 책임감이 날로 커져갔고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죄책감이 더해졌다.


"선생님, 제가 이걸 공부해왔는데 맞는지 확인 한 번만 해주실 수 있을까요? 30초정도만 확인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


내가 질문을 해도 받아주시는 분이 없었다. 물론, 그 분들도 자신들의 일이 있으셔서 바쁘셔서 그랬을 것이다. 타이밍을 확인하고 여쭤보는데도 참 힘들었다. 그리고 한 번 물어보는데 그 분들의 짜증을 받아야 한다는 것도 나에겐 정말 큰 스트레스였다. 내가 하나 알려주면 넌 뭘 해줄래라고 묻는 분도 계셨다. 물론 이 세상의 모든 간호사 선생님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친절한 간호사 선생님들도 정말 많다. 그냥 내가 있던 부서가 그런 분위기의 부서였을 뿐이다.


난 출근하기 2시간 전에 늘 의학도서관에 들렸다. 거기서 내가 맡은 환자와 비슷하게 치료하고 있는 환자들의 케이스를 수도 없이 읽고 공부했다. 어떻게든 난 내 책임을 다하고 싶었다. 내가 맡은 환자분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내 최선을 다했다. 


"너, 출근하기 전에 의학도서관에 다녀온다며?"

"네, 조금이라도 공부하고싶어서요."

"공부하면 뭐하니. 나아지는 건 없는데. 시간낭비야."

"네...."

난 그래도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가 조금만 친절하게 가르쳐주시거나 잘 해내고 있다고 말씀해주셨다면 조금 더 힘이 났을텐데. 


그들이 나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할 이유나 의무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나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그러니 난 서운해할 수도 없었다. 친절엔 이유가 필요하다는 거. 사회에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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