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우리에게 말을 걸던 저녁

보이지 않아도 이어지는 마음

by 유담

남편의 눈가가 촉촉하다.
퇴근하는 나를 기다렸다는 듯, 조카에게 들은 아버지의 병환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내놓는다.
나이 듦 앞에서 밀려오는 서글픔이 그를 감싸는 것 같다.

실명까지 갈 수 있다는 의사의 말.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생각들이 마음속에 조용히 스친다.
남편은 의자에 앉아 묻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주저리주저리 풀어놓는다.
슬픔 둘 곳을 찾듯, 딸아이의 학교 이야기에 잠시 기대어본다.

딸의 반 친구를 흉내 내며 깔깔 웃어 보이지만
그 웃음 아래에 지워지지 않는 슬픔이 잔잔히 깔려 있다.

지금 아버지는 흐릿해진 시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하철을 타는 일, 장에서 물건을 고르는 일,
유일한 탈출구처럼 붙들던 일기 쓰기도
이제는 손에서 멀어지는 것일까.
그 생각이 닿는 순간, 마음 한쪽이 서서히 무너진다.

오래 전의 어머니도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처음엔 초점이 맞지 않아 불편함이 많았지만
시간이 흐르자 그 불편함 속에서도 삶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아마 그래서였을까.
어머니는 지금의 아버지에게
“눈 한쪽으로도 잘 살아”라고,
자신의 경험을 건네주듯 위로했다.

하지만 그 말이 아버지에게 얼마나 닿았을까.
사람의 슬픔은 비슷해 보인다고 해서 닮은 슬픔이 되는 건 아니니까.
누군가에게는 버티게 해 준 말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막막함을 더 선명하게 만드는 말이 되기도 한다.

남편은 두 분 사이에서
어머니의 용기와 아버지의 두려움을
같은 마음으로 걱정하고 있는 듯했다.
자식이라는 자리가 원래 그런 것일까.
부모의 삶을 대신해 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덜 아프기를, 덜 잃기를,
조금이라도 덜 무서워하기를 바라며 서 있는 자리.

사람은 무언가를 잃고 나서야
그것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깨닫곤 한다.
빛도, 일상도, 서로의 마음도.
너무 오래 곁에 있어서 당연했던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흐려지고 나서야
그 값어치를 다시 보게 된다.

어머니의 말이 아버지에게
완전한 위로가 되지 않았을지 몰라도
그 안에는 분명 사랑이 있었다.
다만 사랑이라고 해서
언제나 정답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
그 자리에 조용히 남았을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상처가 남긴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