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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토 Feb 26. 2021

빛나는 금손이 부러운 그대에게

나의 그녀를 보내어 줄 때

 안타깝게도 어릴 적부터 손재주가 없었다. 어느 정도냐면 자를 대고도 밑줄을 똑바로 긋는 것이 어려웠다. 타고난 감각이 없다는 걸 깨달은 어린 시절의 나는 꽤나 자존심이 상했다. 어릴 적 나는 머리가 좋은 아이였다. 뭐든 금방 외우고 이해했으며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제법 말도 잘했다. 방안 가득 쌓아놓고 밤새 읽은 만화책(?) 덕분에 이것저것 아는 척 두세 마디 던질 정도의 상식도 겸비하고 있었다. 한데, 그 나어린 자부심이 손으로 만들거나 그리는 것으로만 가면 여지없이 무너졌다. 성적표 가득한 수는 유독 미술과목 옆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지금에 와 생각하니 그래도 제자에게 용기를 주고픈 마음에 고심하다 자그마치 "우"씩이나 주셨던 선생님들의 마음이 감사할 뿐이다.


 타고난 똥 손과 달리 마음은 항상 예쁜 것에 대한 동경이 있었기에 친구들의 단정한 노트필기라던지 수려한 수채화 그림, 예쁘게 정리된 가방 등을 보면 마음이 설렜다. 노력은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나도 차근차근 배우면 언젠가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을 거란 포부를 가지고 6학년 때는 회화부에 들어갔다. 당시 회화부를 지도하던 선생님은 젊고 세련된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높은 하이톤으로 까르르 웃던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당시는 혹여 아이들 마음에 생채기가 날까 말을 가려하던  시대가 아니었다. (물론 이 또한 단정할 수는 없다. 내가 모른 어딘가에는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여 말 한다미도 가려하는 선생님이 계셨을 거라 생각한다) 각설하고! 아이들 가르치는 것이 꽤 지루해 보였던 회화부 선생님은 종종 아이들 놀리며 그 지루함을 이겨내는 듯 보였다.  칠판에 툭툭 몇 글자 적은 뒤 아이들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하고, 당신은 창밖을 보거나 옆반의 선생님들과 수다를 떨곤 했다. 그러다 가끔 아이들 그림을 보며 한 마디씩 했는데, 내 그림은 선생님의 언제나 선생님의 즐거운 타깃이었다. 



"유진아, 너 대체 뭘 그린 거니? 하하하.. 이거 봐.. 정말 재밌다."

"유진이는 그릴 때 표정은 꼭 대단환 화가 같지 않니? 막 고뇌하는 게 느껴져..

  그런데 막상 그림을 보면.. 큭큭큭.."


아.. 정말이지. 1년간의 회화부 생활은 정말 끔찍 그 자체였다. 오늘은 선생님이 또 뭐라고 놀려댈까 생각하면 어떻게 해서든 그 자리를 피해 가고 싶었지만 13살의 어린아에게 달리 뾰족한 방법이 있을 턱이 없었다. 자연스레 내 머리와 마음속에는 '나는 절대 그림은 안돼. 나는 똥 손이야."라는 글자가 하나씩 깊숙이 새겨졌다. 그때부터  나에게그림은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며 감상하는 것이었다. 


비단 그림만의 문제가 아니긴 했다.  끊임없이 무언가 만들어 내라고 요구하던 나의 학교 생활에  7살 많았던 언니는 늘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물론 숙제를 도와주는 언니의 온갖 수발을 다 들어야 했지만 까짓것!!

내 손으로 만들며 점점 망가지는 나의 창작물을 보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 즈음,  언니는 사회 초년생이 되어 매일 녹초가 되어선 집에 들어오곤 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여고라 고1 때 실과가 일주일에 4시간이나 되었는데,  영어, 수학과 맞먹는 엄청난 비중이었다. 4단원이나 되었던 실과를 망치면 내신 점수에 큰 타격이 오는 것이었다. 필기시험에 100점을 맞는다고 해도 치마나 한복 저고리 만들기 같은 실습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내 성적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치마 만들기를 시작하며 이번에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매일매일 선생님이 가르쳐주시는 대로 재단하고 바느질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졸지 말고 열심히 따라가면 되겠지..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을까.. 아니.. 슬픈 예감으로 이미 내가 나의 미래를 재단 지었기 때문일까.. 17살의 나는 그래도 혼자 해보겠다며 나름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최선을 다할수록 나의 치마는 점점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교과서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바느질을 수없이 뜯어냈지만 뜯어낼수록 치마는 더욱 이상한 아이로 변해가고 있었다. 반나절을 눈물이 범벅이 되어 치마를 붙들고 있던 나는 밤이 되어 될 대로 되라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잠이 들었고 날 아침 눈을 떠보니 제대로 완성이 치마가 내 옆에 놓여 있었다. 밤새 다녀간 우렁각시는 엄마와 언니였다. 나의 짜증과 한숨을 두고 볼 수 없었던 둘은 내가 잠들자 이미 거적데기가 된 나의 치마를 가져와 다 뜯어내고 밤새 처음부터 다시 바느질을 했던 것이다.  물론, 재단은 다시 할 수 없었기에 우렁각시들의 눈물겨운 도움에도 중상 정도의 점수를 받은 것 같다.



나이가 들어도 예쁜 게 좋다. 이왕에 받는 선물 포장도 예쁜 게 좋아 포장하는 사람들을 기웃거리도 하고, 몇 번의 손길을 거치면 무성의해 보이던 꽃들도 탐스런 자태를 뽐내게 되는 마법에 꽃꽂이를 배워볼까 문화센터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지금에 와 생각하니 포장기술과 꽃꽃이를 배우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시도가 돈을 내버리는 짓일 뿐 아니라 잘하는이 들 틈에서 남아있지도 않은 자신감을 더욱 깎아먹는 일임을 이제는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망각이란 우둔함을 제대로 장착한 나는 요즘의 다시금 그 모든 것을 모아놓은 세계에 살고 있다. 그곳에서 이모티콘을 그리고 사진을 찍고 붓펜으로 캘리그래피를 하고 비주얼 thinking을 위해 워크지에 그림을 그린다. 물론 모든 게 다 엉망이다. 사진은 수평 맞추기도 힘들고 워크지 그림은 손으로 그리다 결국 캔바 라는 그림 앱을 이용했다. 이모티콘은 나보다 훨씬 손재주가 나은 딸에게 일임했으며 매일 연습해야 하는 캘리그래피는 어느 순간 구석에 처박혔다. 


디지털의 시대라는데 왜 온통 눈에 보이는 건 손재주를 요구하는 것뿐인지 모르겠다. 인스타를 켜면 화려한 금손들이 차려놓은 예쁜 사진이 가득하다. 요새 자주 들어가는 어떤 이는 종이꽃을 만들어 사진을 찍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한참을 넋 놓고 쳐다보다 나 온곤 한다. 누군가는 내가 이런 사진들만 찾아다니니 그렇다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다른 내용도 많은데 굳이 예쁜 사진을 찾아다니며 끊임없이 부러 어하는 내가 자학의 경향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양자리의 A형이다. 양자리는 열정적이고 모험적이며 실행력이 좋지만 덜렁거리고 실수를 잘하는 편이고 A형은 잘 알려져 있듯이 꼼꼼하고 차분하며 성실하다. 나의 기질에는 꼼꼼하나 덜렁대는 같이 할 수 없는 두 아이가 있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늘 깨닫고 있다. 늘 생각이 많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길 좋아하는 양자리의 기질은 가만히 앉아있지 말고 빨리 일어나 실천하라고 나를 재촉해댄다. 그 기운에 이끌려 즉흥적으로 무언가를 하고 나면 뒤이어 꼼꼼한 A형이 나타나 왜 처음부터 차분하고 꼼꼼히 해내지 않았냐며 여지없이 혼을 낸다. 서로 다른 두 녀석을 충족시키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고등학교 때 썼던 습작 노트에는 언젠가 주인공으로 하려 했던 한 소녀의 모습이 쓰여있다.  


잘 다려진 옷을 단정히 입고 예쁘게 머리를 묶은 하얀 종아리를 가진 여학생.  필통을 열면 색색가의 펜들이 흠짐 없이 키 맞춰 놓여있고 책에는 밑줄 아래 예쁜 글씨가 빼곡히 쓰여 있다.  첫인상은 조금 새침하고 냉정해 보이지만 친구들의 물음에는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목소리에는 깊이가 있고 사람들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으며, 말을 많지 않아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기운이 곳곳에 스며있다. 

똥 손인 나에게 SNS 세상은 언제나 눈부시고 부러운 곳이다.  그곳에는 예전 나의 그 새침한 소녀가 여전히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함북 웃음을 담은 아이들의 사진을 찍고 엄마의 사랑이 빼곡한 밥상을 차리며 빛나는 손재주로 꾸며낸 살림살이들을 자랑한다. 그녀 안에 어떤 이야기를 품고 사는지 알 수는 없으나 적당히 가식적이며 적당히 사람 냄새 풍기는 그녀의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다.  어느 것도 하나 예쁘게 만들어 낼 자신이 없는 나는 사진기를 들이밀 때마다 그녀가 떠오른다.  하여,  하얀 눈송이 같은 생크림 위에 빨간 딸기 하나 놓인 아름다운 사진에 홀려 아이들과 만들기 시작한 폭망 한 딸기 생크림 케이크 사진은 차마 어느 곳에도 올리지 못했다. 실망한 나에게 그녀는 가끔 이런 것 좀 못하면 어떻냐 거나 이런 거 말고 본인이 할 잘할 수 있는 것들을 잘해 보는 게 어떻냐고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모른다. 다만 저 아름다움 그녀도  새침하고 차분한 소녀에서 한 두 살씩  나이를 먹어가며  다양한 세상사에 하나씩 치여갈 때쯤 목소리가 한 옥타브씩 커져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때론  내가 조금이라도 손해 볼 까 싶어 한마디라도 지지 않으려 하고 안 해도 될 이야기까지 던지다 집에 와 이불 킥을 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옷 따윈 다려 입을 시간조차 종종 없어지게 되고, 그리하여  어린 자식들 수발에 망신창이가 된  피곤한 몸을 이끌고 헝클어진 머릿 꼴을 한 자신의 모습을 본 어느 날이면 밀려드는 서러움에 목 놓아 통곡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다 자란 나의 소녀는 종종 나에게 잣대를 들이 민곤 한다. '이렇게 하면 더 나을 텐데..', ' 이건 조금 다르게 시도해보지..' 때론 정색을 하며 자기 계발을 하라고 다그치기도 하고 재테크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한 나를 보며 위로하듯 어깨를 두드리기도 한다. 하지만 자존감이 바닥이 나는 날이면 그녀의 위로는 놀림이나 비아냥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녀의 이야기가 진절머리가 나던 어느 날 내 마음이 나에게 속삭였다. 


그건 모두 내가 만들어 낸 것이잖아.


생각해보니 그녀를 꽁꽁 품어내고 놓아주지 않았던 건 나였다. 적당히 아름답고 적당히 가식적이며 적당히 진솔한 울타리를 쳐놓고 그 안으로 숨어들고 가고 싶어 했던 건 바로 내가 만든 나였나는 걸 깨닫은 날에 나는 많이 울고 싶었다. 


마음속 깊은 콤플렉스를 마주하는 것, 그리고 이것을 이겨내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이 글을 적고 있는 지금도 나는 아직은 그것을 완전히 이겨낼 자신 따위는 없다. 다만 이런 작은 고백이 모여 , "적당히" 잘 살아가고 싶었던 두터운 굴레에 작은 틈들을 만들어 내기를  그리고 그 틈이 조금씩 커져가 어느 날 커다란 구멍이 되고 이 단단한 둘레를 속시원히 부셔내 버리기를 조용히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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